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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8>

연화도와 연애의 발견

by 자 작 나 무 2021. 8. 1.

2018.07.08
'로맨스가 필요해', '연애의 발견' 등 로맨스 드라마에서 정유미를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다. 어쩐지 그런 역에 잘 어울렸다. 엄청나게 재밌는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지인이 연애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다며 소개해줘서 보게 되었다. '연애의 발견'을 보고 연화도에 한 번은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며칠 전이 바로 그날이었다. 어떤 방면으로든 사고를 꼭 치는 주기적인 날이다. 비 오는데 나중에 갤 거라 믿고 양산을 들고 배를 탔다. 가다 보면 그칠 줄 알았다. 그건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해본 일기예보를 믿은 탓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연화도 다음 기항지인 욕지도에 가는 모양인지 연화도에 내리는 승객은 많지 않았다.

 

11시 배를 타고 12시 좀 넘어서 내렸다. 비 오니까 바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몇 걸음만 걸어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라산 정상에 갔던 때도 꼭 그랬다. 이번 아니면 언제? 그냥 몇 걸음만 가보고 생각하자. 그렇게 출발한 걸음이 6살짜리 딸을 데리고 산길을 9시간 걸었다. 전날 바다에서 쐐기의 공격을 받아 온 허벅지에 상처투성이인 채로 등산화를 신거나 등산복도 입지 않았다. 물도 도시락도 없이 빈 몸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때는 현빈이 출연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라산에서 만나는 장면 찍은 곳에 가보고 싶었다.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지 꼭 가겠다는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날 얼결에 한라산 입장권을 끊고 몇 걸음만 산책하고 돌아간다는 게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연화도에서도 마찬가지. 몇 걸음만 걸어보고.... 하다가 연화사 찍고, 보덕암 찍고, 사명대사 토굴터에서 내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비옷을 입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더러 여행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처럼 혼자 카메라 들고 비옷 입고 열심히 걷는 한 남정네를 발견했다. 내 등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날 하필이면 내 차림이 카메라에 담기면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 연화사 입구에서 수국 사진을 찍으며 내가 뒤에서 걷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계속 그 남자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수국 사진을 찍었다. 몇 시간 그리 넓지 않은 섬을 돌아다니다 보니 여러 번 마주쳤다. 내 나이가 10살만 더 젊었어도 말을 걸어봤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연애의 발견' 전편 정도는 찍을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지도......

 

특히 그날 보도교를 건널 때 비바람 때문에 무서워서 다리가 절로 내려앉을 것 같을 때 건너편에서 또 그 남자를 만났다. 여러 번 마주쳐서인지 얼굴을 쳐다봤다. 난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피하느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서 나도 그 남자의 얼굴을 봤다. 키도 크고 인상도 괜찮다. 다리를 다시 건너기 너무 무서우니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이든 오해 사기 딱 좋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자주 갈림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한산하고 예쁜 섬에서 비 오는 날 우연치 곤 정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건 상상으로 마무리했다.

그 낯선 남자가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였다면, 또래 정도나 비슷하게라도 보였다면 가볍게 인사를 했을까? 그 동네 사는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며 내게 인사를 건넨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 나누고 차 한 잔 정도 같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여러 방면으로 마음이 굳어 있었다.

 

점심을 못 먹어서 그 섬에 있다는 해물 짬뽕 집에 갈까 카페에 가서 차나 한잔 마실까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짬뽕전문점이라 써놨는데 짬뽕은 팔지 않고 한식뷔페를 한단다. 혼자서 거길 어찌 간단 말인가?

남자 친구 생기면 같이 가 볼 참이었는데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몰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수국 철이라 혼자 다녀왔다. 사전 답사한 셈 치면 된다. 이번 여행에선 어떤 기회든 이성과 부딪힐 기회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회피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한 셈이다.

 

사람을 피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고쳐야 밖에서 '섬'이든 '사고'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든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에 체력 회복되면 맑은 날 수국 핀 연화도에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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