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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2>

4월 26일

by 자 작 나 무 2022. 4. 26.

호기롭게 낯선 도시에서 1년 살기 한다고 말하고 고향을 떠나왔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삭막한 곳에서 종일 KF94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일 때문에 말만 쏟아놓고 돌아서서는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울적하다고 말한다.

 

밖에 나가지 못하게 누가 묶어둔 것도 아닌데 집 밖에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한다. 마스크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밖에 나가면 그럴 수 없으니까......

 

오늘은 즉석 찰 도넛을 주문해서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었다. 찰 도넛을 연이어 먹다가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초, 중, 고를 같이 다녔던 친구 생각이 문득 났다. 해저터널 앞에 있던 가게에 딸 일곱 있는 집에 셋째 딸이었다. 그 집은 해녀들이 타고 나가서 먼바다에서 물질해 온 것을 파는 큰 배도 있는 부잣집이었다.

 

언젠가 학교 나가지 않는 날 친구 따라 그 해녀 배를 타고 나가서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늦게 항구로 돌아왔다. 고픈 배가 등짝까지 붙을 것 같았던 날, 시장통에서 친구가 사 준 찰 도넛은 정말 꿀맛이었다. 한 개를 먹었는지 한 입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 몇이 한 입씩 돌려서 나누어 먹어서 더 맛있다고 기억하게 되었는지 너무 배고파서 앞이 노랗게 보일 정도일 때 먹어서 더 맛있다고 기억하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그때 바닷가에서 먹은 찰 도넛 맛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그 친구가 살아있을 때는 나도 꽤 친구가 많았다. 서른셋에 쓰러져서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를 주축으로 연결되어 만나던 친구들과 소통을 완전히 끊었다.

 

 

*

서른셋은 참 아까운 나이다. 참 이상한 나이다. 서른셋. 한때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남자도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고, 내 절친도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남자, 내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여자가 각각 그 나이를 넘기지 못했다.

 

통영 연화도 보덕암에서 바라본 용머리 해안

너무 열심히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인 모양이다. 어느새 그때보다 20년이나 더 살았다. 앞으로 20년도 이렇게 쉽게 지난 것처럼 느껴질까. 20년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남게 노력해야 한다. 어떤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껴안고 녹여서 흘러가게 세월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

현관에 쌓아뒀던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고 청소기 밀고 대충 걸레질까지 한 뒤에 세탁기 돌리면서 샤워도 하고 이젠 하루를 마감해도 될 것 같은 피로감에 짓눌리는데 누울 자리보다는 일렁거리는 감정의 한 언저리에서 생각이 달막거린다.

무엇이 힘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누가 나를 편하게 잠들 수 있게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갇힌 설움이 흘러가버리게 실컷 엉엉 소리 내어 울 수 있게.

 

말할 수 없는 아픔도, 말할 수 없는 슬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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