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 중 일부
씻고 개운한지 옷을 입지 않고 잠들겠다는 아이를 혹시 알 수가 없으니 입고 자자고 옷을 입혀 놓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이내 이웃집 이층으로 피신을 하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얼 챙겨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수위가 급격히 차 올라오는 걸 보고 아이만 안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문을 연 순간 해일로 넘어온 바닷물이 집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하수구로 역류하던 물이 불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급류에 휩쓸려 신고 있던 신발이 어디론가 달아나고 아이를 물에 젖지 않게 위로 끌어올려 안고 다리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 물길을 헤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이층 집 계단으로 옮겨 가야 했다. 급류에 떠밀려온 나뭇조각과 이상한 파편들에 살이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를 무사히 옮겨놔야겠다는 생각과 물에 휩쓸려 그대로 넘어갈 것 같은 공포감에 통증은 순간뿐이었다.
이층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물이 제법 차 있었다. 비는 바람과 함께 거세게 내리쳤고 공포에 질린 아이는 얼마나 세게 내 목을 끌어안았는지 질식할 지경이었다. 마침 비어있던 이층 집 현관문을 열고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그대로 물이 방안으로 파도칠 생각에 황급히 다시 그 물길을 뚫고 집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펴놓았던 이불을 책상 위로 올리고 아이에게 갈아입힐 옷 한 벌, 내 옷 한 가지를 추슬러 손에 쥐었다. 미처 책상 위로 올리지 못한 얇은 이불 두 개를 둘둘 말아 안고 다시금 현관문을 열었을 땐 물이 허리께로 차올라 걸어갈 수가 없었다.
2022년 9월 4일
기록의 힘을 실감한다.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된 2003년 9월 18일에 기록한 일기다.
오늘은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좀 걷기도 하고 움직여야할 것도 같은데 살짝 열감도 있고 어차피 내일부터 출근하면 끊임없이 요구하는 일에 묶일 텐데 이런 날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충전해야지. 나중에 해지기 전에 비가 오지 않으면 나무 침대에 누우러 공원에나 다녀올까 싶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어서 그다지 돌아볼만한 것도 없다. 그래도 가끔 지난 일기를 들춰보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살았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화할 상대가 있거나 인생을 나눌 상대가 지속해서 있었다면 저렇게 많은 잡담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
아이는 어리고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혼자 속으로 넘치는 생각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게 내 오랜 습성이니 특별한 계기 없이 쉽게 변하지는 않겠지. 비공개로 쓴 일기를 내가 중2였을 때 모친이 뒤져서 읽으신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일기장을 북북 찢어서 마당에 불을 피워서 태워버렸다. 낯간지러운 감정이나 사소한 감상까지 다 쓰는 내 일기를 누군가 몰래 읽었다는 사실이 몹시 싫었다.
여섯 식구가 함께 사는 집에서 나만의 영역이라곤 내 머릿속 밖에 없었고, 당시 사춘기 소녀의 얄궂은 열병 같은 짝사랑의 대상을 두고 쓴 편지며 끝내 고백하지 못한 얼얼한 감정이 그대로 그려졌던 그 일기가 사라진 것이 가끔은 아쉽다. 도대체 나는 그때 어떤 감정에 취해서 살았을까. 어떤 고민을 거기에 썼을까......
한 30년 더 지나서 오늘 쓴 일기를 읽게 되면 그때는 지금 이 나이가 한참 때였는데 왜 그렇게 소심하게 살았는지 아쉬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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