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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2>

9월 9일

by 자 작 나 무 2022. 9. 9.

50년 넘게 해마다 명절엔 집에 콕 틀어박혀서 지냈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니까 길 막힌다는 이유에 차가 없으니 나서봐야 대중교통으로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딸과 둘이 산 20여 년 동안에 다닌 여행도 친구들 도움 없이는 어디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내가 차를 사면 딸이랑 둘이서만 다닐까 봐 위험하니까 차 사지 말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친구들에게 일종의 가스 라이팅 당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가고 싶은 곳 있으면 태워줄 테니 운전하지 말라고 말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물론 의도는 그랬을 테다. 꽤 오랫동안 기침도 많이 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상태가 좋지는 않았으니까.

 

나이가 한참 더 들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다. 이런 기간도 내 인생에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이런 시기에 여행 다닐 수 있으면 다녀야지. 작년 가을 연휴엔 혼자서 시외버스 타고 경주에 연이어 가고 또 가기도 했다. 그만큼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명절 낀 연휴가 아니면 딸과 여행 한 번 가기도 힘들 것 같아서 어릴 때 다니던 곳 중에 꽤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곳, 딸의 기억 속에 친구와 어울려서 재밌게 다녔던 곳을 따라 추억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남해 물건숲, 독일마을, 원예예술촌, 호구산 용문사, 보리암 등이 딸이 기억하는 남해 여행지다. 삼천포대교를 건너 창선교를 또 건너서 남해로 들어가서 발길 닿는 대로 갔다가 남해대교 방향으로 건너가서 하동, 구례, 순천 등지를 떠돌아 볼 참이다.

 

늘 그랬듯이 통영에서 연휴를 보냈다면 거제 동부 바닷가에 다녀오는 정도로 연휴를 보냈을 텐데, 올해는 굳이 통영에 가야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그곳에 가도 일가친척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없고, 오랜 친구 집에 들르는 정도겠지. 미리 연락해두고 명절 다음 날 친구네에는 들러서 얼굴 한 번 보고 와야겠다. 

 

제주는 일주일, 유럽은 한 달 정도 일정이 잡혀야 움직이는, 느리고 충만한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모녀에게 나흘은 멀리 갈 수 없는 애매한 시간이다. 가진 게 시간뿐이었던 내게 여행은 수학여행처럼 랜드마크에 가서 기념사진만 찍고 오는 것으론 부족하고, 그건 여행이 아니다.

 

딸은 맛집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이번 연휴에 전국 어느 맛집도 거의 문을 닫을 테니 그 핑계로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산책하고 한 바퀴 둘러오는 정도에 만족해야겠다.

 

딸은 어제 늦게 잠들어서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다. 기다려도 소용없을 테고, 모처럼 내 곁에서 편안하게 자는 애를 깨울 수도 없으니 나도 한숨 더 자야겠다. 여행은 언제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 지기 전엔 일어나겠지?

 

 

 

*

어제 오후에 일과가 빈 시간에 여행지 물색하고, 맛집 찾고, 여행 코스를 짜는 동안 나도 모르게 흥분되었다. 딸과 함께 여행할 곳을 찾아보는 게 그렇게나 내게는 신나는 일인가 보다. 아끼는 사람과 함께 뭔가 하기 위해 계획하고, 움직이고 함께하는 것에서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나는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해야 기운이 난다. 그게 나를 위하는 길이다. 나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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