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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2>

첫 손님

by 자 작 나 무 2022. 9. 9.

9월 7일

점심시간에 화사한 햇볕 아래 서 있을 수 있어서 잠시 행복했다. 피어난 꽃이며 식물의 생기가 햇볕 아래에서 더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에 한껏 기분이 달아오른다.

 

말없이 움직임도 없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잎을 떨구고 가지 꺾이며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렇게 서 있었을까.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나보다 대단한 생명체인 것 같다.

 

저녁에 동료가 처음으로 내가 사는 원룸에 놀러 왔다. 며칠 전부터 받아놓은 날인데 혹시 안 오면 청소 안 하고 버티려고 꾀를 부렸다. 화요일에 재택근무하게 되어서 월요일부터 사흘 내리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하던 것이 수요일 저녁에야 만나게 됐다.

 

나보다 열세 살 젊은 동료인데 둘이 가끔 저녁도 함께 먹고, 산책도 가끔 함께 한다. 어린 아들이 있어서 주중에 몇 번은 다른 지역에 있는 본가로 퇴근했다가 출근하기에 서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내가 적극적으로 놀러 오시라고 청하지 않는데도 꼭 놀러 온다고 찾아와 준 덕분에 청소도 하고 함께 저녁 시간도 보내게 돼서 정말 고마웠다. 

 

대학 다닐 때 하숙집에선 우리 방에 차 마시러 놀러 오거나 나를 찾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나이 들어서 낯가림을 한다.

 

9월 첫날에 함께 찾아갔던 베트남 음식점에서 주문해서 들고 온 음식을 차렸다. 동료가 들고 온 와인을 따르고 이야기하면서 마시니까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상을 물리고 한 잔씩 더 하면서 블로그 친구가 추천한 와인 리스트를 보고, 동료가 일일이 검색해서 와인병이 찍힌 사진을 저장한 다음에 모아서 내게 보내준다. 나는 와인 이름만으로는 그걸 찾아서 살 수 있는 수준이 안 된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이름을 써넣고 검색하고 다른 사람이 쓴 후기도 읽어보더니 괜찮은 와인이라고 가격대별로 잘 정리된 목록을 칭찬한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리고 너무 가볍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동료이며 친구다. 돌아가면 신경 써야 할 남편과 아이가 있으니 나와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겁지 않고,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대화도 할 수 있어서 객지 생활의 답답함을 간혹 풀어내기에 좋다.

 

겨울방학엔 꼭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를 하고 다짐을 받고 간다. 이번엔 친분이 생긴 30대 후반 동료 둘이 나를 좋게 봐줘서 참 감사하다. 나중에 한참 세월이 지나면 또 지나간 인연일 수 있겠지만 이런 날도 있었다고 기록해둔다.

S.K, B.K 두 분 덕분에 이곳 생활을 견디는 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근무지에서는 친구 한 사람도 사귀지 못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동료가 내 옆자리에 앉았었지만 우리는 밖에서 밥 한 끼 같이 먹은 적이 없고, 따로 차 한 잔 함께한 적도 없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서로 맞아야 서로에게 필요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거다.

 

그곳에서 우연히 같은 동네에서 마주친 40대 초반의 미혼 동료가 나에게 섬 여행도 같이 가자고 적극적으로 청하는 대화를 하고도 나중에 내 나이를 알고 나서 몹시 어색하게 굴었고, 다시는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또래인 줄 알고 친해지려고 했다가 나이가 한참 많다는 걸 알고는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나이를 속인 적도 없고, 어린 척한 적도 없는데 그들이 그렇게 보고 친해지려고 말 걸었다가 뒤에서 알게 된 사실에 멈칫하는 것을 봤다. 몇몇 사람의 속성은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이후엔 오히려 내가 더 조심한다. 나이를 모르고 친해지려고 했다가 앞뒤 맞지 않는 상황을 연출해서 나에게 일부러 다가왔던 그들이 더 민망해질까 하여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것조차 피하게 된 계기는 그런 황당한 일을 해를 걸러서 한 번, 두 번 당하고 보니 어쩐지 나도 불편하다.

 

올해 이곳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런 부류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어서 나이 때문에 눈치 볼 일은 없다. 비록 짧게 스치고 지나는 인연이 되어도 조금 더 깊은 마음을 내고 뭐든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애써 주지 않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늘 거리를 두는 나를 조금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1년 살이 집에 찾아온 첫 손님. 나와 저녁을 함께 먹은 첫 손님. 언젠가 여행도 함께 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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