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5시 40분쯤이었을까. 112 신고가 접수된 시각이 6시 13분이었다고 찍혔고, 내가 휴대전화를 찾아서 전화를 걸기까지 걸린 시간이 30여분이나 걸린 것처럼 기억한다. 실제로는 그보다 짧았을 것이다. 신고하고 112에서 신고 전화를 받는 상담원과 계속 통화를 한참 한 다음에 문자를 받았으니까 내 기억이 맞을지도 모른다.
금요일은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서 몸이 가장 피곤한 날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게 힘들어서 누운 자리에서 오늘이 토요일 아침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고 착각도 할 정도다. 지난 금요일은 유난히 피곤해서 퇴근하면 도망치듯 이 동네를 빠져나가는 버릇이 든 나도 속절없이 피로감에 짓눌려서 집에 와서 씻지도 못하고 누워버렸다.
입고 나갔던 원피스를 벗고 발만 씻고 속옷 바람에 누워있었다. 샤워를 한 뒤에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그 시간에 일이 벌어져서 내가 속옷 바람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문을 크게 두드리며 문 좀 열어보라고 했을 때 문 앞에 가까이 가서 문이 열릴 리는 없으니 누구인지 확인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 있던 낯선 여자가 손잡이를 잡아 끌어서 문을 여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라서 얼른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더는 열지 못하게 버텼다. 밖에서 문을 연 낯선 여자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난 긴머리를 풀어헤치고 검은색 원피스 속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정말 힘이 셌다. 체중을 최대한 실어서 버텨도 그 문을 열어서 내 얼굴과 내 꼬락서니를 확인하게 됐다.
처음 보는 여자다. 오가며 언젠가 이 건물 근처에서 본 적이 없진 않겠지만,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을 눈여겨보는 편이 아니다. 오가며 아는 사람조차 특별한 일 없이는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친다. 특별한 경우 외엔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옆집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싸우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몰랐다.
그 여자는 내 얼굴을 보고 내가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어보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119에 실려갈 때 혹시나 집에서 속옷 차림이라면 너줄한 속옷이면 나중에 정신 들면 창피할 거니까 평소에 속옷도 말끔한 것을 입어야 한다는 우스개를 들은 게 그 순간 떠올랐다. 아침에 입고 나간 원피스가 무릎 아랫부분이 언발라스 하게 단 처리가 되어서 긴 속옷을 매칭 할 수가 없어서 허벅지 정도까지만 오는 속옷을 골라 입었다. 살이 좀 붙어서 그 속옷이 밀착되어서 올록볼록한 뱃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대로 힘 싸움에서 져서 그 여자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나와 몸 싸움이라도 하게 된다면, 만일의 사태가 생겨서 이대로 119에 실려가게 된다면 내 차림은 정말 민망하고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안간힘을 써서 문이 더 열리지 않게 버텼다. 옷을 바람직하게 입고 있었다면 어깨가 빠질 지경이 되도록 그런 힘은 쓰지 않고 얼른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방문을 잠그고 휴대전화를 찾아서 112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근데 이미 열린 문을 놓으면 그 여자가 밀고 들어올 것이니까 그 차림으로는 밖으로 도망치거나 그 다음 상황을 연출하게 되면 몹시 부적절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문을 꽉 잡고 베란다에 열린 창 너머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도둑 들었어요! 신고 좀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파트와 원룸이 밀집한 동네인데 금요일 그 시간엔 일찍 퇴근하는 사람 아니면 집에 있는 사람이 드물 시간이기는 했다. 나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은 금요일 퇴근하면 본가로 가거나 약속을 잡아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확률도 많으니 이 원룸촌은 거의 비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방음이 잘 되는 건물인가?
여하튼, 어떤 상황이 되어도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니까 그 여자에게 밀려서 내가 사는 공간에 무단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내 차림새가 소동 끝에 타인에게 노출되면 곤란한 상태니까 더더욱 나는 그 대치극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 여자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고,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무섭게 소리 질렀는지 묻고 싶지만,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묻지 마', '제정신 아님' 상황이었으니 영화 속에서 본 것처럼 뜬금없이 마주치게 되는 불운한 사고로 이 일을 정리해야 한다.
휴대전화를 어디를 가거나 손에 들고 있거나 애플워치라도 사야 할까. 애플 워치.....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물품인데 언젠가 나는 애플 워치를 차고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유용하게 쓸지는 아직 확신이 없어서 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룬다. 그 순간에 애플 워치를 차고 있었으면 긴급통화 버튼을 바로 누를 수 있었겠지.
좀처럼 생기기 어려운 사고를 당한 뒤에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한다니...... 그 침입자가 여자가 아니고 나보다 힘센 남자였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여자였어도 내가 힘 겨루기에서 졌으면 어떤 일이든 더 당했을 것이고, 그 민망한 속옷 바람에 거리로 뛰쳐나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만하기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