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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2>

혼자 산다는 것

by 자 작 나 무 2022. 9. 18.

혼자 지내면 번잡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혼자 여행도 시간만 나면 떠날 수 있다.

 

그 외에도 장점이 있겠지만, 난 태어난 이후에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4남매가 북적이던 집에서 살았다. 스무 살 이후에 대학가에서 살 때도 하숙생이 18명쯤 되는 하숙집에서 같이 밥 먹고 룸메이트와 같이 살아서 온전히 혼자 살아본 것은 딸이 대학가로 떠난 뒤에 처음이다.

 

2020년 가을에 학교 기숙사에 살아서 문만 열고 나가면 어떻든 아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나 침입하기 어려운 장소여서 이렇게 불안에 떨 일은 없었다.

 

올해 2월 말에 이곳에 이사하고 하룻밤 딸이 자고 간 뒤에 여태 여기 와서 딸이 함께 잔 것은 이후에 두 번 정도였다. 내내 혼자 지냈다. 이제 익숙해져서 올겨울까지만 잘 버티면 집에 돌아가니까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의 여파로 혼자 원룸에 앉아 있으니 심장이 울렁거린다.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이 든다. 침입자에게 어떤 피해도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열리는 문을 더 열지 못하게 몸으로 막아서느라고 왼쪽 몸에 체중을 싣고 버텨서 왼쪽 어깨며 목, 팔까지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린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은 상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불편한 일을 겪고 잠시 내 일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작은 소동으로도 이러한데, 갑자기 생긴 사고로 크게 다쳤거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겪게 되는 트라우마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겠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이 겪는 고통의 크기를 상상만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금요일 저녁에 여기서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딸 만나서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다. 밤 늦게 배고프다는 딸 덕분에 굶고 지나간 저녁도 늦게나마 챙겨 먹고, 딸이 곁에 있으니 안심이 되어서 잠도 잘 잤다.

 

익숙한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약이 되는 상황이었다. 어제 낮에 딸과 시간을 좀 보내고 먹을 것 사서 이곳으로 돌아왔다. 오늘 여기서 한 끼 끓여먹고 딸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이 장소에 들어오니 몸이 기억하는 통증이 올라왔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대체로 정신도 몸도 정리하기가 편해진다. 이게 내 생활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이번 일로 다시 확인하게 됐다. 글은 엉망이된 옷장에 있던 옷을 필요한 만큼 꺼내서 다시 정리해서 거는 작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

오늘 오후에 원룸 주인과 통화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출입문을 수리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12월에 방학식 하면 바로 방은 빼겠다고 미리 말씀드렸다. 2월까지 1년 계약했으나 굳이 그 날짜를 채우면서 여기서 살고 싶지도 않고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고 싶다.

 

이제 백 일 정도만 지나면 학기가 끝난다.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일 덕분에 딸과 주말에 이틀이나 같이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딸이 핑계가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나와 같이 자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가버리는데 엊그제 통화 중에 경찰이 다시 찾아와서 대화하는 것을 들은 바람에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이틀 밤 함께 보내줬다.

 

나는 참 단순한 모양이다. 딸이랑 이틀 같이 자고 밥 먹은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최근에 딸이 추천해서 보게 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보고는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대사를 옮겨서 읊었다.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좋은 집에 살아본 적 없는 딸이 드라마를 통해서 좋은 집에 살면 좋은 점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집. 마당 있는 집. 딸과 함께 그런 집에 살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이 있었던 까닭에 집에 대해선 큰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남의 집 살이를 오래 해보니 내 집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지를 가지고 인생을 조금 바꿔야겠다.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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