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섬 <2020~2024>/<2023>

저녁

by 자 작 나 무 2023. 9. 21.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일이 연이어 생겼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러했다. 말로 뱉고 글로 그려서 감정을 도려낸들 과연 다음엔 또 속상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얼마나 유연하게 잘 넘기고 잘 버텨내는지 과정과 결과지만 달라질 뿐이다.

 

오늘은 퇴근 전에 생긴 어이없는 일의 연속선에서 곧장 화를 내지는 않았다. 평상심으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나왔다. 녹음한다는 거 알았으면 그렇게는 못했겠지. 두고 본다. 하지만, 정말 그 자리에 앉을 급이 안 되는 이가 관리자 자리에 앉으니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행태를 보고 바르게 배우자. 나는 그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겠다.

 

 

동네 마트에 들렀더니 수산물 할인대전인가 뭔가를 한다. 생새우를 올해 한 번도 맛보지 못했는데 잘 됐다. 냉동실에 오래 뒀던 냉동 새우는 이미 먹었으니 오늘은 생새우를 사서 요리하기로 했다.

 

말린 붉은 고추를 요리하기 좋게 슬쩍 빻은 것을 작년 늦가을에 고등어 파스타 만든다고 샀다. 두어 번 쓰고 그대로 뒀더니 못쓰게 됐다. 그럼 말린 불고추를 한 봉지 사야 할까? 다른 용도로 쓰려고 샀다가 남긴 말린 고추도 있으니 그걸 쓰기로 하고 장 보는 물품을 최소화하려고 버섯 한 봉지만 샀다.

 

결과물은...... 생새우 껍질 홀랑 까고 내장 빼고, 새우 똥 따느라 손에 냄새만 비리고 독한 게 배서 엉망이다. 껍질 일부를 남기고 새우 꼬리 부분도 남기고 까야했는데 발라먹기 귀찮아서 홀랑 다 깠더니 어쩐지 이맛도 저 맛도 아니다. 역시 새우는 꼬리 부분이라도 있어야 요리해도 풍미가 난다. 새우 두어 점 집어 먹고 남겼다.

 

새우 까기 전에 살살 두들겨서 소금간 했던 가지를 슬슬 찢어서 자르고 전분만 살짝 입혀서 가지를 튀겼더니 바삭한 식감까지 더해져서 맛나다. 접시에 옮기면서 거의 다 집어먹어서 차린 뒤에 남은 게 거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연근도 이번엔 살짝 데쳐서 마른 가루만 슬쩍 묻혀서 튀겼다. 아! 역시 책상다리를 튀겨도 맛있다더니 내 입엔 채소 튀김이 제일이다. 가지와 연근 튀긴 것으로 저녁은 끝났다. 생새우는 기대보다 못해서 언젠가 다음 끼니에 먹기로 하고 남겼다. 아마도 껍질 깐다고 손으로 주물럭 거리고 꼬리까지 껍질을 다 벗겨서 요리한 게 변수가 된 모양이다.

평소에 과일 코너에서 본 생블루베리는 이렇게 알이 굵지 않았다. 머루 포도알 크기 정도로 알이 굵은 생블루베리를 보고 가격이 부담스러운데도 그냥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렇게 알이 큰 블루베리가 알이 꽉 찬 생새우보다 훨씬 맛있어 보였다. 

 

오늘은 나를 위한 음식 장만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슬슬 풀리는 경험을 했다. 간혹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밖에서 만든 음식을 전혀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마트에서 눈에 드는 재료를 사서 뭐든 만들어 먹는 게 좋다. 식자재 값이 어지간한 식당에서 사 먹는 가격보다 훨씬 비싸지만, 기분 전환엔 도움이 된다. 

 

빨리 먹겠다고 기름을 제대로 빼지도 않고 담았다. 기름 튀는 거 무서워서 바글바글 끓는 기름 팬에 재료를 던져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대충 건졌다. 튀김은 내게 몹시 위험한 음식이다. 튀기고 굽는 요리 하면서 뜨거운 기름이 손등에 튀어서 생긴 흉이 부지기 수다. 그래도 오늘처럼 꼭 튀긴 걸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엊그제 가지와 연근에 반죽한 튀김옷 입혀서 전으로 부친 것보다 오늘처럼 마른 가루만 살짝 입혀서 바싹 튀겨낸 것이 훨씬 맛있다.

 

며칠 사이에 불같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처리하고 소화하는 방법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을 제삼자처럼 지켜보게 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처리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아서 걱정했다. 며칠 일이 많아서 시간 내기 어려워서 치료받던 것을 쉬었더니 허리와 다리 통증이 심해져서 씩씩거리며 바닷가나 숲길을 혼자 걸을 수도 없다. 

 

오늘처럼 결과물이 어떻거나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동안 묘하게 감정이 다듬어진다.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하고, 나는 귀한 존재니까 이럴 땐 맛있는 것 만들어서 잘 먹고 푹 쉬기로 마음먹었더니 음식 만드는 일이 즐거웠다. 다음엔 속상한 일 생기면 더 맛있는 것을 만들어먹어야겠다. 

 

나에게 맛있는 것은, 가지 튀김, 고구마튀김, 연근 튀김 같은 거다. 표고버섯 듬뿍 넣고 우엉밥 해서 양념간장에 비벼먹거나....... 아, 상상만 해도 맛있을 것 같은 건 그런 음식이다. 여태 딸과 함께 살아내느라고 딸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만들다 보니 내 취향이 뭔지도 한참 잊고 살았다.

 

밤 채 썰어 넣고 백김치 담가서 우엉밥에 연근조림을 더하면 아주 맛난 한 끼가 되겠다. 물론 그런 음식을 만들 시간적 여유나 체력이 뒷받침해 준다는 전제하에.

 

 

*

블루베리는 싱싱하고 알이 굵어도 기대만큼 달지는 않다. 샤인 머스캣은 알이 굵은 게 아주 달고 맛있었지만, 튀김을 많이 먹어서 몇 알 먹지 못했다. 딸이 좋아하는 과일이어서 딸 생각부터 나서 잘 싸서 내일 갔다 주러 갈까 하는 엉뚱한 생각부터 났다. 나는 천상 엄마 노릇에 중독된 모양이다.

 

한 며칠 저녁에도 싸들고 온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밤늦게 먹기를 반복했더니 배만 볼록 나왔다. 게다가 만들기에도 그렇고 먹고 나서도 상당히 위험한 튀김을 즐기니 뱃속에 기름으로 그득해질까 무섭다. 살찌는 건 한순간이다.

 

 

*

그래도 오늘 나는 선을 넘지 않고 감정적인 말을 유연하게 넘겨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을 확실히 줄였고, 무조건 분을 삭이는 방법보다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어루만지는 과정을 거쳤다.  A도 B도 C도..... 내가 그 행태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러려니...... 

 

분노한다고 달라지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다고 생각도 하지 않고 피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배우고 나아질 수 있다면 한 번쯤 실수도 하는 게 바람직하다. 뭔가 안다고 완성형 성장을 한 번에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좋다, 좋다, 좋다. 오늘은 투덜이를 잘 달랬다. 

 

 

*

다음 주에 딸과 며칠 지내게 됐으니 슬슬 청소를 해야 하는데...... 먹고 나니 만사가 귀찮아~~~ 우렁각시 어딨어??

'흐르는 섬 <2020~2024> > <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23.09.24
9.23  (0) 2023.09.24
9.18  (0) 2023.09.18
9.17  (0) 2023.09.17
9.16  (0) 2023.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