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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억울해~

by 자 작 나 무 2023. 10. 14.

10월 13일
평소보다 40분 일찍 출근해서 8시부터 출장. 아주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단체 활동 출장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부터 내 체력의 한계를 넘는 일과를 오랜만에 샷 추가해서 마신 커피 한 잔에 담긴 카페인의 영향력으로 버텼다.
 
거기서 끝났어도 한참 피곤했을 하루였다.


 

퇴근한 뒤에 여차저차한 이유가 생겨서 다시 진주로 돌아갔다. 유등 축제 현장에 두 사람을 내려주고 딸을 만나서 저녁 먹고 같이 걸은 것까진 좋았다. 그간 다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다가 2만 걸음을 걸어서 체력 방전 상태였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종일 외근 나가서 평소보다 고된 일정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딸이 사진을 계속 찍어달래서 230장가량의 인물 사진을 찍었다.
 
오늘 출장 나가서 진로 활동 사진도 끊임없이 찍었고, 저녁에 유등 축제 전경도 조금 찍었다. 거기까진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눈이 그대로 붙을 것 같은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딸내미 전용 사진사로 사진을 마구 찍어달라는 대로 찍어줬다.
 
근데 사진을 잘못 찍었다고 자꾸 구박한다. 오늘 어마무시하게 오래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5시에 딸내미 만나서 밤 11시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감사해야 하는 줄 아는데 자정이 다 되어서 집 근처에 도착해서 주차할 곳이 없어서 뱅뱅 돌다가 겨우 한 자리 찾아내서 주차하고 들어왔다.
 
집에 도착했냐고 묻더니 그렇게 못 찍었다고 구박하던 제 사진을 다 보내달란다. 230장 정도를 보냈다.
이런 걸 다른 사람이 시켰으면 다신 꼴도 안 봤을 거다. 딸이니까 참는다. 억울하고 서글프지만 딸이 아니면 누가 밤늦게까지 나랑 놀아주나.
 
늦은 밤 고속도로에서 밟을 수 있는 만큼 힘껏 가속 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이러다가 한순간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하루를 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몸을 부리고 혼자 외롭게 저녁에 어깨 축 늘어져서 집에 돌아오는 금요일이 싫어서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 그 길 위에 섰다.
 
조금 덜 피곤했더라면 딸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내게 함께 주말을 보낼 남자 친구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따님 모시기 놀이까진 하진 않았어도 됐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없는 힘까지 뽑아내서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입술까지 닿을 정도로 내려오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만큼 나는 딸을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은 거구나......
 
혼자 있으면 기운이 이렇게 생기진 않는다. 딸은 이미 내 품을 떠났고, 나는 혼자 살 자신이 없으니 뭐든 해야겠다. 어떻게든 해야겠다. 오늘은 소소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건 푹 자고 내일 써야지.
 
밤에 차 없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기분이 아주 시원했다. 그대로 세상이 끝나는 벼랑 끝까지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매트릭스 안에서 무엇인들 못하랴. 내일이 또 있다면, 내일도 어디로든 아주 멀리 떠났다가 밤늦게 미친 듯이 달려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날도 있을 거다.
 
삶이 이렇게 버거운 건, 내가 갱년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일 거다. 호르몬의 변화가 사람을 아주 이상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만큼의 제어력은 부족하다.
 
*
유등 축제에 가기 전에 문구점에 들러서 붓펜을 세 가지나 샀다. 내 머리가 제멋대로 긴장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혹스러울 만큼 화도 잘 내고, 문제가 생기면 입으로 떠들기도 한다. 그냥 누르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낮에 일 때문에 갔을 때는 들어가지도 않았던 박물관에 밤늦게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에 반해서 공책 한 권을 샀다. 붓펜 산 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씻고 눕기 전에 공책과 붓펜을 꺼내들고 갑자기 신나서 괘씸한 기분을 누르고 딸에게 사진을 다 보냈다. 새 공책 한 권과 새 펜이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할까.
 
*
이렇게 몸을 피곤하게 놀렸으니 주말 내내 드러누워서 앓지는 않을까? 아님 내일 일찍 깨서 수평선 보러 동쪽 바닷가에 다녀올까? 다음 주에 견디려면 쉬어야 마땅하지만, 이 피곤한 상황에서도 감정이 가을가을하다. 가을을 즐기러 남해에도 가고 싶고, 동해에도 가고 싶다. 지리산 뱀사골도 걷고 싶고, 지리산 대원사 계곡 따라 걷고 싶기도 하다.
 
오늘 딸과 함께 걸은 길 위에서...... 딸의 팔을 붙들고 밤길을 걸으며 정말 행복했나 보다. 이렇게 한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그 말을 먼저 꺼내지 못하고 한참 말을 돌리고 돌리다 보니 결국 내 가슴이 하고픈 말은 그런 거다.
 
이런 사랑을 받지는 못했어도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감사하다. 아직은 내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더 주고 가야 하니까. 더 많이 사랑해 주고 가야 하니까.

내 사진도 완전히 못난이 같이 찍어줘놓고선, 제 사진만 이상하게 찍었다며 구박한다. 억울해~ 내가 오늘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230장이나 네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에 한두 장은 건졌을 거 아냐? 억울해~ 나도 남자 친구 생기면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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