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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장어탕 한 그릇

by 자 작 나 무 2023. 10. 26.

2023-10-26

몸에 기운이 영 돌아오지 않는 것 같고 몹시 지쳤던 월요일이었다.  9월 11일에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엉뚱하게 장어구이집에 한 그릇도 파는 장어탕을 먹겠다고 다리 넘어갔다가 그 음식점 근처에 주차하려고 골목에 들어가서 골목으로 들어오던 차와 모퉁이에 불법 주차한 차 사이에서 우회전하던 내 차가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

 

한 달 보름 만에 오늘 그 집에 찾아갔다. 그날은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112에 신고도 하고 보험 조사원과 대면하고 이러저러한 일처리를 하느라고 결국 밥집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갔다. 

오늘에야 그때 먹지 못하고 뭔가 맺힌 것 같았던 장어탕을 먹었다. 집에 가서 어제와 같은 메뉴를 반복해서 먹는 게 싫기도 했고, 목이 너무 따가워서 약국에 들러서 약이라도 사 먹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내 약국에 들렀다가 지나는 길에 마침 생각나서 들어갔다.

 

이 동네 장어탕은 싱싱한 장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뚝뚝 썰어 넣어서 끓여준다. 짜지도 맵지도 않은 이 집 음식이 그런대로 괜찮아서 한 그릇 다 비웠다.

 

마침 숟가락을 들고 먹기 전에 딸도 이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각에 맞춰서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학교 도서관에 닌텐도로 게임할 수 있는 휴게 공간이 새로 생겨서 친구들과 같이 가서 게임한 이야기를 한다.

 

"너 공부를 하기는 해?"

연락 닿을 때마다 헬스장에 운동하러 간다거나, 기숙사에서 쉬고 있거나 그런 이야기만 들어서 한 달 뒤에 취업 시험을 보는 취준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찾아가서 같이 밥 먹자고 하며 뺏는 시간도 만만찮다.

 

엊그제 만났을 때 삼천포 이야기하다가 삼천포 시장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제고 시간 맞춰서 조만간에 꼭 반세오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오늘 전화해서는 토요일에 딸내미 학교 친구와 셋이서 같이 가자고 한다. 다양한 메뉴를 한 번에 주문해서 먹을 수 있으니 더 좋다고 바로 맞장구를 쳐줬다.

 

몸이 너무 지쳐서 눈이 감기고 기분이 바닥을 기다가 슬쩍 기어올라온다. 장어탕 먹어서 그럴까..... 주말에 밥 먹으러 갈 약속을 해서 그럴까..... 

 

 

*

문득 생각했다. 마음 아픈 일이 생기고 그늘이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거나 나도 언젠가 누구에겐가 그런 적이 있을 거다.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온 것이 남았던가 보다. 기억나지 않는 전생이었다고 해도. 그렇다면 기꺼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견디자.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더 잘 되게 진심으로 빌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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