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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3>

그녀의 화실

by 자 작 나 무 2003. 5. 14.

그녀의 화실은 노천카페처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른 아침을 먹고 혼자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아침 기분을 느껴본다.

언젠가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길 버스에 오르던 생각이며 이맘때쯤 스승의 날, 일찍 수업을 마치고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이 짧은 단막극처럼 떠오른다. 그녀의 차를 타고 법원 근처 한적한 길을 드라이브 하면서나, 근사한 점심을 먹고 화실에 앉아 온종일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주홍빛 베고니아 화분 너머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나는 어쩌면 멈춰진 시간 속에 박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느낀 지 오래다. 창 너머로 종일 이상한 기운이 넘나들었다. 비 올 듯 흐린 하늘 찌뿌둥한 날씨, 그 때문인지 그녀의 심기는 반나절 온통 흐려져 있었다. 내 모습을 잃은 지 오랜데 그녀는 오래전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나를 기억하고 문득문득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눈가를 흐렸다.

몇 잔씩 커피를 마셔대도 뭔가 답답한 속은 시원해지질 않았다. 그냥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의무감으로만 살아선 안 되는데 난 그 의무감조차 마다하려 하지 않는가.......

밤을 지새우던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쳤다. 거짓말같이..... 그 덕분에 온종일 해가 뜰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 볕 아래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게으르던 삶에 한가지 윤기를 더했다고 믿으며 안일한 자신을 위로해본다.

지금같이 위태위태한 삶을 이끈 장본인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만 밖으로만 밖으로만 탓하는 마음이 나서던 부끄러운 모습을 아직도 벗지 못했다.

곧 잠에서 덜 깬 그녀와 통화를 하고 거울 앞에서 흐린 얼굴에 화장하고 긴 머리를 쓱쓱 몇 번 빗질하고 집을 나설 것이다. 방 안에 오래 있다 보니 무엇엔가 붙들린 느낌 때문에 종일 속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

백수가 가서 환영받을 곳이 별로 없으니 그녀의 화실 창가에서 하루를 보내며 온갖 망상에 잠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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