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낮에 업무상 조퇴 가능한 날이어서 점심때 조퇴하고 밖으로 나왔다. 급식 메뉴가 시원찮아서 동료와 밖에서 점심을 먹고, 식물 카페에서 산책하고 놀다가 오후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헤어졌다.
온풍기 바람에 묵은 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로 섞여서 나오는 그곳에선 서류 좀 잡고 앉으면 그대로 눈이 빠지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피부가 간지럽고 부어오른다. 오늘 피부과에 가서 부어오른 부위를 진정시킬 약을 처방받았다. 이렇게 잃을 게 많은 직장에 다녀보긴 처음이다. 최악의 경험이 삶의 근거지를 확실히 바꿀 결심도 하게 했다.
병원에 들렀다가 곧 장거리 운행을 자주 할 것을 감안하여 미리 엔진오일을 교환했다. 마트에 들러서 생소한 과일 한 가지를 사서 집에 들어가려니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다. 냐옹이네 가족을 보러 갔다. 건물 뒤 나무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한 마리씩 흩어져서 앉았다.
얼마 전에 봤을 때는 도망치기 바쁘더니 어쩐 일인지 살금살금 한 걸음씩 내 뒤를 쫓아와서는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새끼 고양이들이 그 사이에 조금 더 자랐다. 밥그릇 물그릇을 확인하고 한 바퀴 둘러서 열린 건물 안에 들어가서 근심을 푼다.
나의 테라스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지점까지 보이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해지면 이 자리엔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바람이 포근한 12월, 오늘은 희한하게 봄밤 같다.
종종 해지기 전에 가서 책 읽으며 음료 한 잔씩 마시는 카페가 저쪽 언덕에 보인다. 바닷가 산책길엔 가로등 불빛이 선명하게 물 위에 어룽거리는 게 고흐의 그림 속 한 장면 같다. 그 길 위에 서서 혼자 불빛이 희미한 구역을 걸을 때엔 빛 대신 뭍을 향해 물드는 소리에 가슴이 뛰고 설렜다.
그 길을 다른 언덕 위에서 보니까 그림 같은 풍경이 된다.
인생도 종종 조명 밝힌 자리에 따라서 비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통스럽거나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누군가는 불 밝힌 부분만 보고, 누군가는 불 꺼진 장면만 본다. 우리는 원인을 심었으니, 결국 때가 되어 조건이 무르익으면 이어질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어졌는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볼 수 없을 뿐.
* 메로골드 자몽 해체
인생의 쓴맛을 봐야 단맛도 알게 된다. 달달한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생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허황된 인사말에 처음엔 경기가 일었다. 그런 게 어딨어?
신맛, 쓴맛, 단맛, 짠맛 모두 적당하면 조화롭지만 한쪽으로 과하면 고통스럽다. 매운맛이 맛이 아니고 감각에 대한 폭력이듯, 어딘가 치우친 불균형한 도드라짐은 불편하다. 내 미각은 아주 미미한 단맛도 느낄 수 있다. 쉽게 지나치는 작은 행복감도 극대화해서 느끼듯 단맛을 느끼는 감각이 극대화된 상태다.
식물원 카페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과일을 한 개 샀다. 꽤 커 보이는데 한 개 1,980원이다. 메로골드 자몽이라는데 덥석 장바구니에 넣는 사람이 없다. 다들 눈치 백 단이다. 안 먹어봐도 자몽보다 더 쓴맛이 날 것으로 예상하는 눈치다.
내가 한 개 가져와서 해체 쇼를 벌였다. 껍데기 무지하게 두꺼워서 벗겨놓으니 알맹이는 소박한 크기다. 거기다가 쓴맛의 절정판인 속 껍데기를 벗기지 않으면 참고 먹기 곤란한 시고 쓴맛. 인기 없는 이유를 알겠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입에 넣지 않아도 신맛이 머리끝까지 느껴진다. 시고 쓴맛이 강하지만 그 속에 담긴 천연 단맛을 헤아려서 찾았다. 온갖 영롱한 시고 쓰고 희미하지만 단맛까지 입안에서 최대한 느끼며 한 개를 다 까서 먹었다. 그래 너는 이런 맛이었구나. 더 잘 익은 메로골드 자몽은 이렇지는 않을 텐데, 잘못 골라서 그런지 첫인상은 그리 좋지는 않다.
하지만, 속껍질까지 까면서 엄청나게 집중해서 과일 한 개를 먹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먹다가 적당히 배불러서 다이어트하기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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