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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젯소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by 자 작 나 무 2024. 2. 29.

2024-02-29

 

2009-11. 피아노 치며 노는 내 딸 뒷모습

 

어제 오후에 시작한 가구 손질은 오늘도 계속.

연이은 기침에 가래까지 달고 살던 시절에, 호흡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MDF 가구를 방에서 거실로 내보내고 방안에 채울 나무 가구를 사려고 온라인 쇼핑몰을 한참 뒤졌다. 그 당시엔 아무래도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선뜻 나무로 만든 가구 한 점 들이기도 어려웠다.

 

합판이거나 집성목이어도 MDF 가구보다는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두 가지 사서 집에서 만들기 시작해서 결국 더 채울 수 없을 만큼 작은 나무 가구를 만들었다. 2009년에 만들어서 몇 년 쓰다가 못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여태 잘 썼다. 위 사진 속에 있는 저 색깔 수납장은 이사한 집에 들여놓을 자리가 부족하니 한 개는 버리고 와야 한대서 들고 오지 않았다.  

합판으로 만든 채소장은 잡동사니를 넣고 문 닫아버리면 보이지 않으니 잡다한 물건은 많고 수납할 공간이 부족한 우리 집에 꼭 필요한 가구다. 양철 손잡이를 떼고 사포로 한 번 밀었다.

 

어제 먼저 페인트칠한 수납장은 마지막 바니쉬 작업만 하면 된다. 바니쉬 한 통 정도는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뒤져보니 색깔이 조금 나오는 스테인 종류만 두 가지 있어서 새로 주문했다.

 

 

딸이 오래 쓰던 디지털 피아노 위에 딸내미 친구가 어릴 때 생일선물로 준 인형을 올려놨다. 선물 받은 인형은 버리지 못하고 죄다 들고 왔다. 가방에 거는 작은 인형까지 빠짐없이.

 

사포질 하고, 젯소 바르기

합판으로 만든 이런 가구를 15년째 쓰게 될 줄 몰랐다. 손질 잘해서 더 수리해서 쓰기 곤란할 때까지 쓸 거다.

젯소 바른 게 마를 때까지 휴식.

 

오늘까지 이틀 정도 시간 내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딸내미 방에 넣은 물건을 정리할 가구가 없어서 계속 어수선할 것 같다. 책상이 없다고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딸에게 빨리 준비해줬어야 할 가구를 새로 장만해서 줄 것이 아니라면 더 지체할 수 없으니 개학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새로 출근하는 직장에서 해야 할 일 준비를 하기로 했다. 

 

*

페인트칠하면서 어깨와 팔이 저린 것을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평화로웠다. 붓질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묘한 희열감에 집중해서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종일 일했다. 십수 년만에 해보는 일이니 처음 해보는 일 같지만 지금 이런 상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 정도면 겉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성과(?)도 있으니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다.

 

단순 반복되는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할 수 있게 익숙한 노동요(?)를 틀어놓고 한다. 멍하니 손끝에서 색이 칠해지는 걸 보다가 어깨와 허리 통증에 드러눕고 싶어 지기 전까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훅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가기도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한 가지씩 떠올려본다.

 

 

*

T냐 F냐?

어떤 친구가 내가 딸과 나눈 카톡을 보더니 내 딸이 T라고 말했다. 친구네 딸 둘과 남편까지 다 T여서 가족 단톡방에서 말 길게 하는 건 자기뿐이란다. 내 딸도 핵심 단어 외엔 나열하지 않는다. 가끔 그게 서운할 때도 있었다.

 

나를 돌이켜보니 친밀한 관계 외엔 거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느껴질 만한 표현을 거의 하지 않으니 나도 T인가 싶다. 그런데 어떤 땐 F다. 쓸데없는 감정적인 단어의 조합을 남발한다. 며칠 전, 졸업식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딸이 T와 F를 기준으로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극 F 성향인 친구는 불편하다고 한다. 나도 딸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대화가 줄어들고, 자주 하던 농담도 끊게 되고 점점 뻣뻣해지는 것 같다. 

 

상대에 따라 내 성향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두 가지로 나누는 그 성향 분석의 틀에 맞게 나를 분류할 수가 없다. 친한 사람과 대화할 때 분명 나는 넘치는 F 쪽인 것 같고, 친한 친구인데도 때론 내가 아주 간결하게 대화를 똑똑 자르기도 한다. 

 

어제는 몇 마디 더 붙였어도 될 대화를 나도 모르게 잘랐다. 업무 중에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꼭 필요한 경우 외엔 카톡이란 걸 즐기는 편이 아니다. 용건 없이 말 걸 데도 없거니와 카톡 대화를 즐기지 않으니 잘 모르는 사람과 사적으로 친해질 계기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내 기준에 맞춰서 상대방이 일하는 중에 내가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쑥 먼저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 한마디라도 더 하면 방해가 될까 싶어서 더 해도 될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제는 나에게 건네주는 인사에 한마디 더 화답할 수 있었고, 그러고 싶었는데 어느 선을 지켜야 좋을지 몰라서 인사를 받고 다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 하지 못한 말이 오늘까지 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

지구상에 우리나라 안에 있는 도시에 이사 왔으면서 외계 행성으로 이주한 것 같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먼저 조금 더 유연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내 표정은 상당히 압도적인 딱딱함 그 자체이고, 감정을 표정에 실으면 코미디로 변한다.

 

가끔 거울 보면서 '이런 표정은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적절한 선으로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 너무 날 것 같아서 풋내 나고 어리숙해 보인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거나 그건 상대방의 몫이라고 여기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떻게 남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이해하겠는가. 꼭 충분히 이해받을 필요도 없겠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오해 사기 좋은 말과 행동을 할 필요도 없겠다.

 

결국 내 문제는 어떤 경우에나 중용의 길을 찾는 거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표현하는 방법 탐구. 

 

요즘 일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내향적, 외향적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거나 감정적이냐 이성적이냐는 두 가지 틀로 나눈다. 꼭 그 타입에 맞게 사람을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적정선에서 이해하고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결과물 중에 하나로 그 틀을 이해한다.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것은 혈액형에 따라 서너 가지로 성격 유형을 나누는 것보다는 좀 낫다. 더 다양하게 144가지 성격 유형 코드로 나눈 방대한 경우의 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타인이 나로 인해 불편하지 않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적절한 경계를 충분히 알 만큼 나이가 들었음에도 늘 어렵다.

 

딸에게 하는 말조차 어느 선에서 해야 좋을지 몰라서 고민한다.

1. 이것 좀 해 / 2. 이것 좀 해 줄래? / 3. 이것 좀 해달라고 해도 될까? / 4. 이것 좀 시켜도 되니?

1번 형태가 아니면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내 딸에게 오늘도 4번으로 말했더니 답이 없다.

 

상대방에 따라 직설과 우회적 언어를 적절하게 선택 하지 못하면 대화는 실패한다. 지금 내 기술(?)로는 앞으로도 대인관계를 더 넓히긴 어렵겠다. 혼잣말하며 쓸쓸하게 늙어가지 않으려면 더 노력해야지.

 

 

이제 젯소 바른 것 다 말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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