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2
자칭 동네 백수, 우리 집 취준생.
오늘 처음으로 집 밖으로 혼자 나갔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거나, 치킨 집에 주문한 치킨을 가지러 나가는 정도의 짧은 외출(?) 외엔 단 한 번도 혼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던 우리 집 집순이. 동네 백수 패션이 필요하다며 옷 타령을 하는 딸 비위에 맞출 옷 몇 가지가 도착한 뒤에 그 옷을 아래위로 쫙 빼입고 드디어 집밖으로 나갔다.
집에 온전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딸이 함께 있으면서 내 방에서 혼자 있는 것과는 뭔지 모르게 다른 기분이다. 오전에 내 몸은 침대와 일체화되어서 그 밖으론 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무겁기만 했다. 오후에 딸이 나가자마자 거짓말처럼 후다닥 주방에 가서 고구마를 씻어서 찜솥에 올리고(나는 찐 고구마파, 딸은 군고마파), 달걀 몇 개 풀어서 찜솥에 올렸다.
딸 반찬거리와 내가 먹을 것을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 딸은 이틀 정도 고기를 주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대놓고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자꾸 먹을 게 없다고 한다.
얼른 꽈리고추 김치를 버무리고
알배추로 겉절이하려고 소금물에 절여놨다.
밥 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게 떨어졌는데 그냥 나가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딸내미 손에 밥 얻어먹기는 힘들겠다. 아직 현미밥이 두 그릇 남아있지만, 딸은 현미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른 백미를 씻어서 앉혔다.
밖에 나간 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급한 불은 꺼놓고, 마음이 편안해야 나도 일 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 정도는 쉬엄쉬엄 해야 할 일을 하루이틀에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그간 이런저런 자잘한 일도 많고 힘들어서 뭐든 계속 밀린다.
쉬지 못하고 계속 일해서 지쳤고, 마음도 지쳐서 쉬고 싶지만.....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건 이유가 있겠지.
멸치 액젓이 없다. 배추 절인 것 물 빼놓고 겉절이 양념 만들어보려니 멸치 액젓이 없다. 대충 만들었다가 맛없으면 애쓴 보람도 없을 테고..... 겉절이 해놓으면 보쌈 먹고 싶다고 말할 것 같은 딸에게 먹일 고기도 사러 나갔다 와야 할 모양이다.
우리 집 동네 백수에게 줄 새 책상은 한 달 기다려야 온다고 해서 취소도 못하고 내내 기다린다. 다른 책상을 주문해도 몇 날 며칠 기다려야 한다면 여태 기다린 것 감안해서 더 기다리는 게 나을지.......
책상 없어서 공부 못한다는 딸이 새로 산 동네 백수 패션으로 예쁘게 화장하고 쫙 빼입고 나간 뒤 10분 만에 동네 헬스장에서 일시불로 내 카드를 그었다. 매달 갚아내야 할 카드값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이사한 동네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선 일을 하는 게 나을 거로 생각한다.
이럴 때 내가 편하게 쉬고 회복할 수 있게 백업해 줄 가족이 없으므로..... 힘들어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쉴 수 없다는 아쉬움은 내겐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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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갈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2년 전에 부산에서 1박 2일 여행을 함께 했던 지인께서 어머니 모시고 가려던 여행에 변수가 생겨서 동행이 필요하신 모양이다. 이유가 어쨌든 그 순간에 나를 떠올려서 연락 주신 게 너무나 고마웠다.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가뭄에 콩 나듯 1년에 한두 번 연락할까 말까 해도 누군가 나를 적절한 때에 떠올려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언니가 운영하는 학원 강의를 월요일은 빼서 일, 월 이틀 여행이 가능하신 모양이다. 내가 이사하고 일을 구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적당한 때에 필요한 여행인가. 월요일 출근해서 다시 달려야 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은 관계로 여행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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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몇 시간 파닥거려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기운 빠진다. 쉬어야 움직일 수 있다. 집안일 좀 하고 나니 내 일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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