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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09>

지리산 천왕봉

by 자 작 나 무 2009. 9. 2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 언제나 몇 번이라도

 


7월 26일 당일 코스로 천왕봉 등반에 도전했다. 올여름휴가 기간 동안 제1 목표였다. 언젠가 꼭 딸 데리고 천왕봉까지 가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적어도 1박 2일은 산에서 지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여름 방학이 되기 전 몇 차례 가장 빠른 코스인 중산리로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순두류까지 갔다가 소풍을 즐기고 오는 정도로 걸어보고 다음엔 법계사 셔틀버스가 순두류까지 운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법계사 가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가 보는 등 몇 번 연습 산행을 했다.

 

 

 

7월 25일 밤 중산리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산행할 계획이었으나, 한밤 중에 갑자기 지영이가 눈에 알레르기 증상을 심하게 보였다. 작은 벌레에 쏘인 것처럼 작고 붉은 점이 생기더니 눈이 벌게지고 눈 주위가 부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저는 다음날 꼭 산에 가겠다 했지만 한눈에 봐도 애 얼굴이 정상이 아니었다.

 

26일 다음날 아침, 눈 때문에 한 번 입원한 적이 있는 경상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마땅히 문을 연 병원도 없었고 비슷한 증세로 입원한 탓에 지영이 차트가 있으니 그나마 그곳이 좀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접수해놓고 수십 분을 기다리게 하고선 담당의사가 없으니 돌아가란다. 게다가 지영이 눈이 그렇게 부어오른 것은 알레르기 증세라 자기들도 어찌해 줄 수 없다는 변명만 늘어놨다. 병원에 가기 전에 분명 응급실에 전화해서 안과 담당의사가 병원에 있는지 확인을 했는데 뜬금없이 의사가 없단다. 다행히 지영이 눈은 몇 시간 안에 다시 가라앉았지만, 더운 날 그렇게 한바탕 통영에서 중산리로 중산리에서 진주로 왔다 갔다 난리를 치고 나니 진이 좍 빠졌다.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7일 아침 일찍 중산리로 향했다. 중산리 코스로 등반하면 아이와 내 걸음이 느린 걸 감안해도 중산리에서 순두류-로터리 산장-법계사-천왕봉 코스로 아무리 늦어도 8~9 시간 정도 잡으면 다녀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10시 전후로 산에 올라갈 수 있으면 해지기 전에 순두류까지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간단하게 마실 것과 간식(삶은 계란, 오이, 귤) 정도만 챙겨서 가방에 넣고 열심히 앞만 보고 걸었다. 시간이 워낙 빠듯해서 올라가는 길에는 사진 찍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사진을 찍어보아도 실제로 본 것보다 훨씬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고 싶지도 않았다. 비가 언제 쏟아질지 모를 조마조마한 날씨에 산중에서 자주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물방울 속을 지나야 했다.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몸은 지치고 마음은 다급해졌다. 1시 즈음까지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중간에 다시 돌아가기로 했기에 나름대로 정한 시간 안에 꼭 정상에 올라야 했다. 예약과 준비 없이 산장에서 1박 할 수는 없는 상황에다 이렇게 힘든 길을 언제 다시 도전한단 말인가. 내친김에 꼭 해내야 한다는 '깡' 그 자체로 버텼다.

 

가는 길에 많은 가족들을 만났고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은 지영이보다 2살이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천왕봉에 오르는 부자였다. 처음에 그들과 마주쳤을 땐 아이보다 아빠가 더 지쳐 보였다. 우리가 그 팀을 추월해서 정상에 올랐다 내려올 즈음에 다시 그 팀과 마주쳤을 땐, 아이가 초주검이 된 얼굴로 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중간에 만났을 때만 해도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던 아이였는데, 천왕봉을 내려오는 길에 만났을 땐 우리랑 눈 맞추고 인사도 겨우 할 정도였다. 가방에서 과일을 꺼내어 나눠주고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지만 역시 아이들에겐 힘든 코스였나 보다. 그에 비하면 지영이 체력은 정말 천하장사급이다. 물론 중간중간 볼맨 소리하며 애를 몇 번 먹이긴 했지만 오가는 길에 지영이에게 던져준 어른들의 칭찬에 아이는 날개를 단 듯이 산길을 타곤 했다.

 

전날 갑자기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져서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고 재채기와 콧물로 계속 걱정을 시키더니 정작 산행길에서 그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동안 다녀본 천왕봉 등반코스는(그때는 20대였다.) 거림이나 백무동 같은 곳이었는데 이렇게 하루 만에 천왕봉에 후딱 올라갔다 올 수 있는 코스는 나도 처음이었다. 지리산에 더러 가도 천왕봉까지 올라본 것이 15년은 족히 지났다.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상 표지석은 오래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10살 먹은 딸 데리고 올여름 극기훈련 코스로 천왕봉에 마음먹은 대로 다녀왔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막힘없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천상 아줌마.... ㅠ.ㅠ 이젠 더 안 늙어졌으면 좋겠다. 20대에서 바로 40대가 돼버린 것 같은 지금 기분으로는 이 사진 속의 모습조차도 수긍하는 게 억울하고 서글프다. 이대로라도 곱게 나이 들자. 늙지는 말자.

 

 

 

 

천왕봉에서 만난 다람쥐. 한껏 지쳐있던 우리가 단숨에 기분 좋게 팔짝거리게 했던 천왕봉 다람쥐. 등산객들이 흘린 음식을 주워 먹으러 온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에 통천문쯤에서 찍은 사진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내려왔지만 흠뻑 젖지 않았고, 다친 곳 없이 잘 다녀왔다. 언제 다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경험 중에 단연코 가장 멋진 경험이었다. 지영이 6살 때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왔고, 이번에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가 봤으니 남한 제1,2 봉은 다 올라가 본 셈이다.

 

내려오는 길에 지영이는 선뜻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우리 동네에 있는 미륵산에 오를 땐 귀찮다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때만 걸어오곤 했는데, 이젠 올라갈 때도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 아이와 나 둘 다 체중이 많이 불어서 그때처럼 가뿐하게 산에 오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지만, 다음 주말에는 꼭 함께 산에 올라가고 싶다.

 

지난여름의 힘찬 기억처럼 늘 함께 건강하고 밝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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