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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사과

by 자 작 나 무 2024. 9. 17.

2024-09-17

보름 정도 쉬니까 그간 길들었던 생활의 틀에서 신체 리듬이 이탈했다. 아침 일찍 깨는 습관은 깊은 새벽잠을 못 자게 했고, 그렇게 자고 싶었던 아침 늦잠의 형태로 변형됐다.

 

오늘은 꼭 일어나서 전형적인 아침상을 차려야 하는가 생각하며 누운 자리에서 몸이 무거워서 뒤척이고 있었다.

"배 안 고파?"

내가 꺼낸 첫마디에 딸이 방문을 연다.

"어제 너무 무거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별로 안 먹고 싶은데....."

 

어제 조치원에 갔다가 길에서 산 사과와 저녁에 동네를 헤매다가 동네 빵집에서 산 빵 한 개를 나눠서 먹었다. 우리에겐 적당한 아점이었다.

 

조치원역 앞 공영 주차장에 주차하고 엊그제 맛있게 먹은 음식점에 돈가스 먹으러 갔더니 재료 소진으로 점심 장사가 일찍 끝났다. 달리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리어카에 '사과 만 원'이라고 씐 종이를 보고 맛보기 사과 한쪽 받아먹고 사과를 샀다.

 

우리가 얼마 만에 맛보는 사과인가. 작년부터 사과 값이 너무 올라서 도무지 사과 사 먹기가 어려웠다. 어제 길에서 산 사과는 열 개 만 원이었고, 맛도 괜찮았다.

 

오늘 아침은 사과 한 알씩 먹고 빵 한쪽씩 먹으며 딸과 잡담을 나눴다.

"엄마, 아침에 어떤 커뮤니티에 그런 글이 올랐더라고. 사과 못 깎아도 시집 가는데 지장 없다고 누가 썼는데 그 아래에 공감하는 댓글이 많아서 정말 웃겼어."

 

"그래, 사과 못 깎을 수는 있지."

 

"근데, 그게 엄청 어려운 기술도 아니고, 양치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잘 깎지는 못해도 몇 번 노력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걸 대단한 일인 것처럼 치부하며 저러는지 모르겠어."

 

내가 어제저녁에 고른 사과가 상당히 푸석푸석해서 딸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아침에 딸이 고른 사과 두 알을 얌전하게 깎아내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남에게 깎아줄 게 아니어도 자기가 과일 먹으려면 어떻게든 깎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것 정도는 부모가 가르쳐야 되는 거 아닌가?"

딸이 내게 사과를 깎아주며 그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겼다.

 

다행이다. 딸의 말에 의하면, 사과 깎을 줄 알게 내가 잘 가르쳤구나.

사과를 감자 깎는 칼로 돌려 깎기 하는 지인의 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게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딸이 삶의 기본적이 기술을 어떻게든 우리 삶 속에서 배운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든 배우고 익혀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현재 삶에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우려고 애썼던 내 삶이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할 줄 모르는 것보다는 할 줄 아는 게 마음 편하다.

 

내일 아침에도 딸이 깎아주는 사과를 먹을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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