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uhki Kuramoto - Lake Louise
서울에 첫눈이 오던 날 새벽 내 핸드폰은 새벽 세 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문자 오는 소리가 났다. 잠귀가 밝은 것인지 그날따라 예민해서였는지 느지막히 든 잠이 그 소리에 잠깐 깼다가 또 한 시간 쯤 후에 문자 오는 소리에 잠이 깜빡 깼다.
세 개의 문자가 들어왔는데 죄다 눈 온다는 소리였다. 가끔 연락하는 친구 세 명이 차례로 보낸 것. 혹시 여기도 눈 올지 모르니 창문을 열어보라나..... 그 새벽에..... 여긴 따뜻한 남쪽이라 어지간해선 눈이 오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눈이 오면 여긴 비가 오거나 흐린 정도인데 이번엔 날이 차갑고 맑다.
어쨌거나 첫눈이 새벽에 내리는 감회를 나름대로 그렇게라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보낸 것이었겠지만 나는 일요일밤 늦게 잠들었고, 다음날 월요병 증세때문에 종종 늦잠을 자곤하는 게 신경 쓰여 잠을 설치고 싶지 않았다. 그 눈 소식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그나마 곤하게 한숨이라도 더 자려는데 이번엔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새벽녘 술 먹으면 가끔 전화하는 친구 녀석 하나가 내가 혹시 비관 자살이라도 할까봐 걱정돼서 했다는 전화를 시작으로 차례로 이어진 문자 세례에 첫눈 오는 감회를 알리는 전화에 평일엔 심심해서 머리에 곰팡이가 필 정도가 되어도 한 통 안오는 전화가 어쩐 일로 겹쳐서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하는 것인지.....
또 다른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지만 안 받아도 눈 온다는 소리 할려고 걸었지 싶어서 무시하고 자버렸다. 결국 늦잠을 잤다. 집 앞까지 오는 어린이집 버스를 놓쳐서 제법 멀리 있는 어린이집까지 아이를 데려다주고 보니 출근 시간까진 어중간하다. 최근에 갑자기 불어난 체중이 신경쓰여서 이렇게 시간 났을때 좀 걷자는 생각에 한참 걷다보니 바람 센 다리까지 와버렸다.
그대로 화실에 나가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자면 한없이 몸이 늘어져서 제때 못나갈게 뻔한데 더 걷고 싶어도 얼마나 바람이 차고 시린지 도무지 더 걸을 엄두가 안났다. 거긴 버스도 안다니는 곳이라 택시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걸어가려면 한참 더 바람을 맞아야 할 것 같아 그 다리목에서 동동거리며 서 있었다.
급할 게 없으니 늦게 와도 괜찮다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머리가 얼얼해졌다. 다리엔 간혹 지나는 차들 외엔 걸어다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필이면 다른 때보다 유난히 추웠던 그 날 거길 걸어다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게 뻔하다. 그만큼 추울 것까진 생각않고 오랜만에 그 다리를 걸어서 건너볼 것이라는 야무진 생각까지 했으니 정말 생각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생각을 한 것이다.
택시는 몇번이나 거기까지 걸어온 것을 후회한 뒤에야 왔다. 택시를 타고 화실 언니 아파트로 갔다. 거기서 비비적거리다 같이 출근하려고..... 진작에 어린이집 앞에서 택시를 탔으면 이 고생을 안했을텐데 먹기는 왜 그렇게 미련하게 많이 먹고 살찐 건 왜 탓해서 평소에 안하던 운동한다고 한 번 걸어서 살 빠질 것도 아닌데 그 미련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살이 과히 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집에서 빈둥거리다 밖으로 매일 나다녀야 하는 내게 맞는 바지가 하나 뿐이란건 신경 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바지 하나 버리면 밤에 씻어 말려서 다음날 입고 나가야 할 지경이다. 즐겨 입던 청바지들은 터져나갈 것 같아 도무지 입을 엄두가 안난다.
이 정도면 약간은 빼야할 것인데 긴 겨울 주로 방안에서 컴퓨터랑 노는 습성을 가진 내게 살을 뺀다는건 무리다. 그래서 미리 걱정되서 걸어다녀보리라 생각한 것인데 그게 화근이 되어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미련한 짓해서 감기 걸린거 들통날까봐 언니한텐 그냥 좀 걸었더니 춥더란 말만 하고 목이 간질간질하길래 따뜻한 꿀물도 타 먹고 단단히 하고 잠들었건만 다음날 아침 몸이 굳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이상하게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을텐데 왜 이렇게 추울까 생각하고 몸이 꺼져들어가는 기분으로 한참을 누워서 잠에 깊이 빠지지도 깨어나지도 못하는 상태로 있다 눈을 겨우 떠보니 이미 밖에 나가야 할 시간이 넘었다. 방이 싸늘해서 보니 보일러 고장이다.
바보같이 좀 뜨끈하게 해놓고 몸을 풀고 나간다는게 냉골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체온으로 버티고 있었던 거다. 이러고 걸린 감기 누굴 탓하랴. 내가 아프면 문병 올 사람도 약을 사다줄 사람도 없는 뻔한 일. 안 아픈게 제일이다. 아플 때 서러운 기분 너무나 잘 알기에 어떻든 빨리 더 심해지지 않게 해야겠다 싶어 아이 감기약으로 사놓은 물약도 홀짝 한 모금 마시고 꿀물도 타 먹고 오늘은 아주 뜨끈뜨끈하게 해놓고 잤더니 한결 낫다.
나름대로 내 생각해서 문자를 보내준 친구들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할텐데 잠 못자고 피곤한 상태에서 찬바람 맞고 걸었던 게 그 친구들 탓이라 생각했다. 고맙단 말 보단 새벽에 뭣 땜에 문자 보내서 나를 곤란하게 했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동갑내기나 또래 친구 중에 아직 장가 못간 녀석들은 의외로 성격 털털한 내가 만만하니 술 먹으면 전화를 한다. 나도 그 쓸쓸한 심사를 알기에 주정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을 나는 잘 받아주는 편이고 실컷 이야기 들어준 후에 술 먹고 또 전화하면 가만 안 둔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래도 또 전화를 하고 나는 전화를 받는다. 서로 얼굴 한 번 안본 사이인데도 그렇게 된다는게 신기하지만 참 좋다. 허물없이 초등학교 동창처럼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를 잃게 될까봐 서로 만나지 않기로 했다.
때론 열 명의 남자 친구보단 한 명의 애인이 더 좋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 큰 차이는 없지만 둘 다 없는 것보단 편한 친구라도 있는게 좋은 것 같다. 남녀 사이에 좋은 친구가 된다는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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