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밤이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서 문이 잠겼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잠들기 전에 지영이가 나에게 편지를 썼다. 자꾸만 말을 시켜서 종이 한 장을 주고 내게 하고픈 말이 있으면 뭐든 써보라고 했다. 다섯 살짜리가 글 배워서 무슨 말이든 편지로 쓸 수 있다는 게 예뻐서 마냥 흐뭇해진다.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는 내 등 뒤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빗으로 계속 내 머리를 빗겨주고 면봉으로 귀도 닦아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 걸 아는지 오늘은 말도 없이 시큰둥하게 있는 엄마를 위해 풀서비스를 해준다.
편지 쓴 종이를 펴놓고 나는 괜히 혼자 마음이 찡해진다. 코끝도 찡해진다.
"어린이집에서 골고루 먹습니다.
(집에선 좋아하는 것만 먹는데...다행...)
친구를 안 괴롭힙니다.
(나도 비폭력주의니깐 당연히 내 딸도 그렇다니 기분 좋아.....가끔 남자아이들한테 긁혀서 돌아오곤 하는데, 고놈들 가서 한 대 패줄까?)
친구들은 나한테는 안 놀아줍니다.
(사실일까...? 왜 아이들이 내 딸이랑 안 놀아준다는 것일까?)
엄마가 맛있는 거 사주고 엄마가 마산에도 데려가 주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마산 대우 백화점 다녀온 것을 기억하고 쓴 모양)
엄마가 찜질방도 데려갑니다. 고맙습니다.
(처음 가본 찜질방이 아이에게도 인상적이었나보다)
짧은 내용이지만 글씨도 제법 또박또박 가지런하게 쓴 것이 너무 이뻐서 깨물어주고 싶다. 사랑스러운 내 딸~ 무엇을 해도 용서가 되고 이쁘게 보이는 가족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맘껏 내 마음 넘치는 대로 표현해도 다 받아주는 내게 유일한 가족인 지영이를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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