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길로 달리는 노선의 시내버스를 타고 벼가 노랗게 익은 논 사이로 열린 길을 걸어 찻집을 찾았다. 유혹하듯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내 뜨거운 가슴이 새삼스레 잠시 웃음 짓게 만드는 오후였다.
이대로 낡고 정든 신도 벗고 길 따라 무작정 그저 걸어가고만 싶은 가을 길..... 황금빛 갈기 사이로 상처를 숨기고 또박또박 걸음을 내딛는 상상 속의 동물이나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한 한때는 신의 일족이었을지도 모를 의문의 존재가 되어 가을 길을 걷고 있는 긴 그림자.
나의 상상은 버스가 나를 내려준 허퉁한 길가에서 사뭇 멀리 떨어진 인가로 접어드는 들길이며 좁은 동네 길을 접어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늘하늘 긴 머리카락 하오의 햇살을 받으며 반사되는 빛으로 잠깐씩 금빛으로 보이는 순간 나는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지나온 길이 그림자를 잃고 표류한 섬이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다 전설처럼 먼 훗날 떠올려질 때 나는 이 농담 한마디로 지나온 세월 모두를 은근한 미소 속에 담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해인이네 찻집에서 내 몸에서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만성피로와 독소들을 씻어내기 위한 약재로 선택한 차를 샀다. 그동안 생활비 아끼느라 몇 번이고 망설이다 사 오지 못했던 다기와 차를 반값으로 사서 가방에 넣고, 손에 꼭 쥘수록 정이 묻어나는 고사리 같은 아이 손을 땀이 나도록 꼼지락꼼지락 솥뚜껑 같은 내 손안에 품고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이 아픈 삶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없이 온화하게 비춰주는 달을 보고 눈물이 핑 도는 내 눈 속으로 자잘하게 부서지는 달빛에 말하였다. 아프면서도 행복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쁨을 느끼는 오묘한 심장을 가진 나를 변함없이 항상 사랑해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오늘따라 눈이 시리도록 사랑스러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심장의 전율을 전하고 싶어 더 꼭 쥐고 바닷가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기를 뜨거운 물에 소독하고 차를 우려내어 아이와 나란히 앉아 다소곳이 찻잔을 들었다. 몸속에 들어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나쁜 균들이 이 찻물에 씻겨 나가주기를 바라며 나는 무슨 대단한 보약이라도 달여 먹이는 비장한 기분으로 찻잔을 채워주고 그것을 기분 좋게 마시는 아이를 보며 또,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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