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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5>/<2025>

선물받은 차

by 자 작 나 무 2025. 2. 9.

2025-02-09

 

엊그제 딸내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서 내 선물로 꽃차를 사 왔다. 점심때 놀러 나간 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어쩐지 더 심심하고 길어진 나의 하루를 마감할 시간에 문득 사진만 찍어놓고 찬장에 모셔둔 꽃차 한 잔을 우려냈다.

 

함양에서 농장을 하는 지인이 선물 받은 꽃차 열댓 가지를 그대로 나에게 넘겨서 아직 개시도 못한 꽃차가 갖가지 유리병에 담겨있고, 겨울 초입에 대전 찻집에서 귀하다는 목련차를 선물 받았지만, 그 역시 황송해서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모셔놨다.

여전히 개구쟁이에 사춘기 소녀 같은 감성의 딸 친구가 받는 내 취향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그림이 상자마다 눈에 띄는 포장지 예쁜 차를 골랐다. 2년 전 가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가을 국화 한 다발을 첫 만남 선물로 준비했던 예쁜 아가씨다.

 

나는 답례로 마땅히 줄 것이 없어서 신경 예민하고 마른 체형에 작은 문제로도 깊게 고민하는 그 성격에 자주 앓을 것 같은 배앓이에 효과 있는 상비약 한 통을 안겨서 보냈다. 선물을 주고받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뭔가 고르는데 소질이 없다.

 

전에 해외배송비 아까워서 한 번에 세 통 주문한 그 소화제 한 병에 300알이나 들어서 두 통은 지인 중에 자주 앓는 사람에게 주려고 마음먹고 한꺼번에 샀다. 한 통은 딸 친구에게 갔고, 한 통은 작년 가을에 세종까지 찾아와 준 통영 친구에게 건네줄 참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부담스러워서 손을 댈 수가 없고, 어떤 사람의 마음이 담긴 선물은 흔쾌히 받아서 쓰게 된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받아선 안 될 것과 받아도 될 것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선택되는 것 같다. 선물 받은 이들에겐 아직 내가 줄 것이 남아있는 것이고, 선물 받기 곤란한 이들과는 더 인연을 이어가면 안 될 것이라는 추측이 가로막는 것인가 명확하지 않다.

 

최근에 만났던 친구가 만나자마자 내게 내밀었던 약 한 통을 이제 감기 얼추 다 나아서 괜찮다는 뜻으로 사양했다. 그 친구가 주는 건 뭐든 받고 싶었는데 내 마음과 달리 나도 모르게 두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내가 준 것도 없이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작은 것이라도 그냥 받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물을 한다면 도대체 뭘 준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몇 해 전에 나의 아이돌이라는 의미로 팬으로서 준비했던 우양산 하나를 건네고 받았던 청인유쾌환은 종종 목에 통증 있을 때마다 감사하게 잘 먹었다. 선물을 먼저 준비한 게 내 평생 몇 번이나 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게 기본 원칙이다. 뭔가 그냥 받으면 불편하다.

 

절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미나에서 매번 선물을 들고 오신다는 고수들께서 지난번에 준비해 주신 선물을 날름 받아먹어서 이번 세미나에 참석할 때 도대체 난 뭘 준비해야 좋을지 고민이다. 만들어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 최대한 열심히 먹었지만, 맛이 고약해서 정말 먹기 힘들었던 초콩, 지역 특산물 햅쌀, 지역 대표 먹거리 간식 등 생각나는 게 많은데 그걸 다 날로 먹었다.

 

나는 아직 한참 배워야 할 하수인 데다가, 꽤 오래 백수 생활을 했으니 돈 들여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할 것 같으니 이번에도 그냥 참석만 해야겠다. 다음 절기 세미나엔 성심당 빵이라도?

 

 

*

며칠 전에 만들었던 칠리 새우가 딸내미 입맛엔 썩 맞지 않았는지 냉장고에 음식이 남았다. 오늘 저녁에 케첩을 조금 더 넣고 데워서 팽이버섯 볶은 것들 곁들여서 남은 분량을 다 먹었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 습관을 바꿔야 해서 딸이 없을 땐 내 입맛대로 아무거나 먹는다. 

 

밥은 안 먹고 반찬만 먹어서 됐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누워있으니 말린 블루베리를 듬뿍 넣은 핫케이크 생각이 나서 핫케이크를 구웠다. 우유가 없어서 거품기로 달걀을 한참 친 다음에 그릭요구르트를 넣어서 반죽했다. 전엔 그냥 달걀과 그릭요구르트만 섞어서 반죽했더니 핫케이크가 부풀지 않아서 식감이 별로였다. 이번엔 달걀을 거품기로 한참 쳐서 그런지 적당히 부풀어서 폭신한 게 식감도 좋았다. 

 

딸은 블루베리 넣은 걸 먹지 않는다. 내 취향으로 만든 음식은 혼자만 먹는다. 아직 집에서 한 번도 깻잎 반찬을 만들지 않았다. 오이 무침도 먹지 않아서 20여 년 동안 오이 무침도 집에서 한 번 만들어 먹지 않고 지나왔다. 올해는 먹고 싶으면 그냥 만들어야겠다. 비록 혼자 먹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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