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밤늦게 하던 빨래를 낮에 하고 음악과 함께 커피도 마시고 아직은 나가야 할 시간을 재촉받지 않는 조금은 한가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불안한 시국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이 없으니 차츰 이 황당한 난국의 사태는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무릇 봄은 봄인가보다. 어제 나가는 길에 집 근처에 있는 열녀비각에 키 큰 목련이 화사하게 뽀얀 꽃을 피운 것을 보았다. 그 곁에 나란히 선 벚나무 두 그루도 곧 꽃을 피울 것인지 움이 조금씩 돋아 올라와 있었다. 그 두 그루의 벚나무는 해마다 왼쪽에 있는 꽃나무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진 후에야 오른쪽 나무에 꽃이 피곤 한다.
오른쪽 벚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고 잎부터 올려서 왼쪽 나무 꽃이 화사할 때 잎을 보이고 섰다가 왼쪽의 꽃이 질 무렵 잎을 올린 가지에서 꽃이 피는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겼으나 이 동네에 살면서 다섯 번째 봄을 맞이하는 내게 올해도 여전히 그 두 그루의 나무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 열녀비각 안에 서 있는 두 나무는 어쩌면 그 열녀와 남편의 영혼이 깃든 것은 아닌가 하는 야릇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 동네에 살던 어부 한 사람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실종되자 남편을 찾으러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간 그의 부인이 남편의 시체를 꼭 끌어안고 떠올라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일이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에서 열녀비를 세웠다고 적혀져 있는 해평 열녀비.....
조금은 외진 바닷가 한적한 동네에 그나마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그 비각에 선 오래된 목련이나 벚나무가 아니면 유난히 바닷바람이 센 이곳은 봄을 느끼는 시기가 늦어질 텐데 그나마 그녀의 넋이 깃든 비각이 일찍 찾아드는 남도의 봄을 일러주곤 한다.
그 근처를 지날 때 간혹 오래전 살았을 그녀를 떠올리면 가슴에 묘한 떨림과 여운이 생겨난다. 그녀가 남편을 찾아 나선 것은 따라 죽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혼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요즘의 세태에 한갓 가벼운 옛날이야기 한 토막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는 그 이야기가 가끔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진정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젊은 날의 무모한 열정만은 아닐진대, 넋을 끌어당기는 듯한 정념과 집착이 남아있는 내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잔잔한 충고를 들려주듯 그 두 그루의 벚나무는 마주 보고 서서 서로 꽃이 피는 것을 지켜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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