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화실 언니와 수제비를 먹으러 찾아 들었던 그 찻집을 찾아 아이랑 둘이 버스를 타고 오후께나 되어 길을 나섰다. 그 집에 사는 꼭 내 딸 아이 같은 다섯 살배기가 일요일이라 내 딸 만큼이나 심심할 것 같다. 동무 삼아 둘이 놀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만 뜨면 놀러 나가자는 일요일이라 마침 잘 되었구나 싶어 차도 마시고 바람도 쏘일 겸 나선 길이다.
한바탕 퍼붓듯이 내리던 비가 그친 다음 날이라 그런지 구름 사이로 비쳐든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시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도 금세 풍경은 시골 맛이 난다.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들어간 그 찻집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화해 보니 방금 집을 나섰다는 것이다. 그냥 돌아갈까 했더니 가던 걸음 차를 돌려서 주인이 찻집으로 돌아왔다. 두 아이는 보는 순간부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웃으며 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만난 그 아이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동행해서 어딘가 나서던 스님들 두 분이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 앉았다. 난 초면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무척 어색하고 머쓱해 하는 편이라 아이들 노는 걸 지켜본다는 핑계로 자리에 냉큼 앉지 못하고 계속 왔다 갔다 하다가 주인이 내주는 차를 마셔야겠기에 못이기는 척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찻집 주인이 만들어주는 차는 향기가 은은하고 입안에서 단맛이 돌았다. 아는 스님 빈소에 차 한잔 올리러 함께 가던 길이라는데 바쁜 걸음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온 나를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낯가림도 없이 신나게 뛰어놀았고 녹차를 몇 번 우려 마신 뒤에 다관에 말린 국화꽃을 넣고 다시 우려 마신 국화꽃 차는 엷은 녹차와 어우러져 향이 더 은은하고 향긋했다.
입안으로 도는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저 먼 기억 한 움큼 깊은 곳에서 되돌리는 그런 맛이 나는, 찻집 주인의 흰 손끝을 타고 찻잔으로 쪼르르 내려오는 국화차 한 잔. 손님들과 찻집 주인은 다시 가던 길을 나서고 아이 둘과 나는 빈 찻집을 독차지하고 그들이 볼일을 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흔들의자에 앉아 해가 넘어가고도 남은 빛으로 밝아 있는 하늘에 회 빛 구름이 흩어져 있는 광경을 한태주가 부는 피리 소리와 함께 바라보았다. 찻집 안은 제법 더웠지만 땀을 흘리면서도 견딜 만 했다.
내 인생의 고비들이 굽이굽이 언덕진 길을 내달리면서 가끔 나를 비탈진 곳에서 넘어지게도 하였고, 그렇게 견딜만했던 것처럼 조립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달려든 한낮의 복사열이 뜨겁게 그 집을 달구고 식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차분히 앉아 음악을 즐기고 창 너머 보이는 하늘빛에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한태주가 부는 오카리나 소리가 어느새 나를 하늘 연못에 데려다 놓은 모양이 인지, 눈이 스르르 감기고 길지 않은 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멈춘 듯 시간은 감정의 깊은 골까지 스며들어, 꿈꾸듯 지친 마음은 초원을 거닐다 만난 연못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아..... 아직도 나는 꿈결처럼 살고 있구나. 현실을 꿈인 듯 바라보며 구름 위에 연못을 찾아다니는구나. 그래도 누가 내 인생을 논하고 탓할까. 산다는 것이 아프고 기쁘고 힘들고 즐겁고, 온갖 인연이 겹겹이 얽히고 다시 풀어나가는 과정 중에 꿈인 듯 생시인 듯 바람인 듯 구름인 듯 흘러가다 비도 만나고 바다도 만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아픈 것만 알고, 감은 듯 뜬 눈으로 가만히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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