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또 깨어있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책상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 이게 내 모습인가. 부쩍 요즘 들어 인상을 쓰고 다니게 된다. 햇살이 강해진 탓이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에 그늘이 많이 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의식적으로 굳어진 얼굴을 펴보려 하지만 이상하게 얼굴 근육이 잘 움직여주질 않는다. 정말 호쾌하게 웃을 일 없이 얼굴 근육은 이대로 굳어져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은 유난히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다. 친구 아들 녀석인 인영이가 도무지 말이 안된다 싶을 정도로 요즘 사사건건 애를 먹인다. 신경과민일 수도 있다 싶어 크게 나무라거나 매를 들고도 때리지도 않았지만, 집에 와서도 떠오르고 인상을 다시 쓰게 되는 걸 보면 뭔가 그 녀석이랑 마찰이 있는 건 분명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녀석이 노크도 없이 자기 집이라고 문을 확 열고
"선생님! 매는 왜 안 치워요? 그건 선생님이 치워야 하는 거잖아요!"
6학년이나 된 녀석이 하는 말이 그렇다. 내가 참...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벌써 계절이 몇 번씩 바뀌도록 거의 매일 서로를 겪고 있는데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 정도이면 내가 문제가 많거나 그 녀석이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근데.... 다른 녀석들은 처음에 내게 보였던 그 오만불손한 태도를 거두고 고분고분해졌건만 처음엔 젤 얌전해 보이던 녀석이 참으로 엉뚱한 일면을 보이는 데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대들거나 하는 경우는 몇 번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녀석의 태도들이 이상하게 눈에 거슬린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위험한 일도 아무 생각 없이 해버리는 엉뚱한 장난기를 지니고 있다.
3층에서 스카이콩콩을 친구에게 집어 던져 다치게 할 정도면 내가 너무 과하게 민감한 것은 아닐 것도 같은데 그래도 아직 어린애를 두고 그 아이의 행동과 태도에 내가 이렇게 속이 상하고 답답해야 하는 건지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좋을지..... 이딴 문제로 내가 왜 고민해야 하는지 그냥 내일부터 그 녀석은 빼버리거나 아예 일을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오늘은 화가 났었다.
밤새 잠을 설쳐 피곤한 까닭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놓고 크게 야단 한 번 안치고 그냥 나왔다. 그만하면 잘 참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못하다. 내일 가서 친구를 붙잡고 아들에 관해 이야기 하면 결국 그 녀석 엄마한테 회초리 맞고 벌서게 될 테고 그 녀석은 아무리 심하게 야단맞아도 이틀을 못 가는지라 별 소용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미리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직도 여전히 목이 자주 아프다. 말을 많이 하면 괴롭고 여기저기 아파진다. 그래서 말하는 직업을 고른 것을 후회하게 되었던 적이 더러 있었다. 손가락으로 떠드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고 싶었지만, 손가락으로 밥 먹고 살 재주는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으로 떠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리고 소심한 내가 다시 교단을 찾게 될 일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 들쭉날쭉하고 힘없는 사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성질에 맞지 않아 짜증난다.
앞으로의 일들을 꺼내어 걱정하긴 싫지만, 더러 생각하다 보면 어떤 철학관에서 들은 것처럼 내가 천직이라 여겼던 교직이 어쩜 내 능력과 천성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아갈 직종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처럼 유행에 무디고 꾸밀 줄 모르는 여자에게 그다지 안 맞을 것도 같지만 미용이나 요리 쪽의 직업이 훨씬 맞을 것 같다는 말을 흘려듣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직 서른다섯 밖에 안되었는데 한참을 청춘이라 여기며 살아가야 될 텐데 도대체 무얼하며 살아야 속도 덜 답답하고 돈도 벌 수 있을 것인지 두고두고 또 생각해야 할 숙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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