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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06>

통영기행-추석 <2006/10>

by 자 작 나 무 2006. 10. 12.

2006/10/12 23:06

10월 6일


 

   

그 숲에 갔었다. 곧게 하늘 향해 뻗은 편백처럼 내 마음 가지런히 줄 세우고 싶은 날,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욕망의 푯대라고 여겼던 그 기운을 온 몸에 입히고 싶었던 날, 내 욕심을 채우려 백팔배를 하던 이율배반의 장소였던 산 언저리. 애초에 이름없는 들꽃이어도 바람이어도 좋겠다 하였던 여린 소녀의 자취는 열반의 꿈처럼 아득하고 또한 허망하게 세월 속에 묻히었나.

 

말이거나 글이거나 뱉는 순간 점 하나쯤은 더 찍히거나 빠진 것이니 더 이상 진짜 마음이 아닌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다음엔 오히려 말도 글도 제대로 뱉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만큼 더 아끼고 더 사랑해줘야 한다고 나는 늘 자신의 단점을 다독이면서도 시선과 질책을 두려워한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는 자신 뿐이므로 진정 나를 알고 나를 나무랄 수 있는 이도 나 뿐이다. 남의 말은 흘러가며 스치니 내 속의 울림과는 다르게 곧고 곧은 말도 쉬이 퍼져버리곤 한다.

 

 

 

 보이지 않으나 느낄만한 것은 다 느낄 수 있는 이 공간을 오래 전부터 믿고 아껴왔다. 그리하여 그 느낌대로 어떤 이에게 느끼고 주고받는 말에는 믿음과 애정의 두께가 달랐으리라.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번 확인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기력이 쇠하여 고달프고 아픈 몸으로도 추석을 혼자 보내지 않게 멀리서 찾아와주신 선재님께 무어라 인사를 하여야 좋을지 몰라 처음 얼굴을 대할 때도 고개만 까딱했다. 나처럼 말이 없어도 뭔가 느끼셨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 내 어설픈 말 몇 마디 그냥 꺼내놓기 서먹하여 아끼고 아끼다 삼켰다. 물론 나를 보러 온다고 오신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오시는 걸음에 내가 사는 곳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계획하신 것은 나를 염두에 두고 오신 것이나 다름없다.(사실이 아니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착각을 가끔 상당히 즐기는 편이다.)

 

좋은 사람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지영이는 내 심정을 거울같이 반영하는 아이다. 아이의 웃음은 내가 비록 겉으로 희희낙낙하지 않아도 편안하고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각기 그 웃음의 색깔이 다르다.

 

 

 

유난히 시야가 맑아 사뭇 먼 곳의 섬들도 선명하게 보였다. 전날 진주 남강에 하나 둘씩 불을 밝히고 아름다운 빛을 선사하던 등불의 향연도 아름다웠지만, 바다 위에 하나 둘씩 고개를 내민 듯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자리한 섬들의 행렬은 더 화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달아공원에서 본 중 가장 선명하고 눈부시게 푸른 광경이다. 사진기로 차마 그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겠다며 아쉬워 하면서도 하마 잊을까 카메라의 기억에 의지하는 순간, 이미 눈은 더 깊은 의식 속에 몰입하여 사진보다 더 찬란한 기억을 만든다. 

 

 

 나도 그대도 섬이련가. 그래도 한 하늘을 보고 있으니 가끔 외로운 날 하늘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 곁눈질이라도 나누어 보면 덜 외로울까......  

 

 

 추석에 제대로 된 음식을 식당에서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회를 먹고 싶다는 지영이의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어떻든 한번 쯤 횟집에 데려갈까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선재님과 동행해오신 친구분께서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먹어야 한다고 하셔서 문 열어놓은 횟집을 찾아 느지막히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평소에 찾아가던 집과는 너무나 비교가 될 만큼 서비스가 형편없는 곳이었다. 횟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해저터널을 걸었다.

 

 

 

어스름녘에 남망산 공원에 올랐다. 막 해가 떨어진 서쪽 하늘이 남은 빛을 마저 태우고 가려는 듯 붉은 빛이 스멀스멀해졌다.

 

통영, 그대는 어쩌면 이리도 오밀조밀하고 정겨운 포구를 안고 있는가. 고향을 떠났다 돌아왔던 그 해 겨울에도 하나둘씩 불 밝히기 시작한 작은 포구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뭉클해졌었는지...... 내 가슴에도 저물녘엔 어둠을 밝힐 작은 빛 하나 움트려나.....

 

 

 

 

마지막 산책 코스로 바닷물이 바로 코 앞까지 올라온 듯한 만조 시각에 리조트 부근 바닷가를 걸었다. 둥근 달빛이며 물 위에 영롱한 불빛들이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채워진 것 같은 가을 저녁, 바로 추석이었다.

 

물 위로 어룽이는 불빛따라 마음이 끊임없이 잔물결지거나 흔들리거나 먼 곳에서 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해 보이는 이 광경들처럼 우리네 삶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잔물결들에 더러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때론 거센 파도와 맞서기도 하며 제 자리를 찾고 지켜나가야 할 인생의 희비곡선이 오늘은 그저 원만하고 그득하게 찬 달처럼 모두 평안했으면...... 오늘 하루 만이라도. 그래야 정말 추석답지 않겠니? 보름달, 추석달 알아 들었지?   

 

 

몇 해 동안 추석에 둘만 오도카니 이불 안에 누워 눈만 꿈벅였는데, 올해는 멀리서 오신 선재님 덕분에 넷이 함께 밤을 맞았다.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이다. 딱히 주고 받는 말이 없었어도 그 날 우리가 함께 다니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산책하고 함께 잠을 잔 것만으로도 내겐 엄청난 일이다. 하룻밤 멀리서 오신 왕 이모님들과 함께 지낸 지영이가 하루 종일 저 사진처럼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셔터를 누를 때처럼 이 모든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며 잔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