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일과가 다소 파란만장했다. 다른 때보다 늦게 잠들었어도 일찍 깨어 밥하고 긴 머리도 감고 아이 밥 먹이고 어린이집 보낼 준비를 하던 중 화실 언니가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 정도로 아프니 병원에 같이 가자는 전화를 했다.
허겁지겁 아이를 보내고 언니를 쫓아 병원에 가서 링거 맞는 걸 보고 화실에 돌아가 보니 그사이 온 녀석들이 온통 난장을 쳐서 아래층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가 화가 나서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아~~ 머리야...
장난치다 그림 그리려고 떠 놓은 물을 엎질러서 화실은 물바다에 의자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애들 몇몇이 얼마나 놀았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충 주변 정리를 하고 커피부터 한 잔 마셨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감기 기운에 골골하던 나까지 쓰러질 판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몇 번씩 되뇌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내가 해야 할 일들 몇 가지를 해놓고 병원에 전화해보니 언니는 여전히 다 죽어가는 목소리다.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일과가 어느 정도 끝날 즈음 며칠 전부터 몹시 눈에 거슬리던 갈라진 머리카락이 자꾸만 신경이 쓰여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다 결국 아이가 돌아올 시간까지 1시간이나 남았길래 시내를 배회하다 어떤 미용실에 들어갔다.
"끝에 상한 머리카락이 많으니 좀 잘라주세요."
여자랑 남자가 둘 앉아 있었는데 가위는 남자가 들었다. 배가 슬쩍 나온 그 남자 가위를 집고 내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려 온갖 폼을 잡으며 잘라대더니 내가 요구한 선을 넘어서 잘라낸 머리카락을 자르고 또 자르고 결국 작업이 끝난 후 내 머리는 불길했던 예감처럼 도무지 보아도 적응이 안 된다.
열심히 쓸어서 망가진 몽땅 빗자루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위질 여러 번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난 요즘 유행하는 층이 잔뜩 난 머리스타일을 싫어하는데 내 머리 꼴이..... 도무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내가 앉았던 자리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이 잘려 나갔는지 수북하다. 머리 스타일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는지..... 좀 촌스럽게 보일망정 늘 고수하던 긴 생머리가 뭉개진 빗자루 꼴이 되고 보니 내 꼬락서니도 말이 아니다. 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잘린 머리카락을 다시 붙일 수 있으면 밤새워서라도 한 가닥씩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몹시 심란하고 심사가 복잡해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굴곡 많은 정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라 잘 될 리 없을 거로 생각했으면서도 그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오늘 비극의 시초였다.
길에서 수도 없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커트 값도 다른 곳보다 비싸게 받아서 나오면서 머리카락 뺏기고 돈까지 뜯긴 기분이 들었다. 한 해 몇 번 갈까 말까 연중행사로 다니던 미장원에 뜬금없이 간 것부터가 문제였나보다. 이제 다시 길러서 잘려 나간 만큼 길려면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머리 다시 길 때까지 참새 꽁지 같아 보여도 머리 꽁꽁 묶어 다녀야 할 것 같다. 스타일 바뀌지 않게 적당히 잘라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게 무슨 날벼락~~
여태 안자고 옆에서 뭐라고 쫑알거리는 딸 아이한테 계속 화풀이를 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 머리를 다시 감고 말려봐도 여전히 이 머리 스타일은 내 모습이 아니다. 난 촌스럽게 긴 머리가 제일 어울리는 여잔데 이게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다 세련돼 보이나?? 아유~ 억울해 내 머리카락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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