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섬 <2010~2019>/<2015>

7월 22일

by 자 작 나 무 2015. 7. 22.

 

*

가끔 딸에게 화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열자마자 성적 이야기를 꺼냈다. 1학기 성적이 전교에서 딱 10등이라며 그나마 자존심 안구길 선을 겨우 지켰다며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항상 성적표가 나오면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훨씬 좋은 점수를 받고 등수도 올랐을텐데 그러지 못한게 아쉽고 억울한 듯 말한다.

 

그래서 2학기엔 더 열심히 해서 잘하게 부족한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가볍게 한 마디 해주고 끝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씻더니 초저녁부터 그냥 자버린다. 전날도 학교에서 피구대회해서 피곤하다며 초저녁부터 씻고 잠들었다가 한밤 중에 깨서는 한참을 하는 일없이 노닥거리다 늦게 잠들었다. 그리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딸은 항상 벼락치기로 시험기간에만 바짝 공부하기에 평소에 기본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점수를 받기 곤란한 영어, 수학만 점수가 나쁘다. 영어, 수학 외엔 다 A를 받는데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과목만 B를 받는다.

 

공부하라고 40분 정도 앉혀놨더니 영문법이 너무 까다롭고 어렵다고 짜증을 냈다. 다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 학원, 저 학원 돌리면서 공부시켜서 그나마 잘하는 아이들은 그 공부가 밑거름이 되어 아는 게 많아지는 것인데 자기처럼 하루 아침에 뚝딱 벼락치기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딸이 짜증을 내는 게 싫었다.

 

나무로 된 지휘봉을 하나 들고 딸을 거실에 앉혀놓고 바닥을 툭툭 치면서 야단을 쳤다. 기분좋게 살살 이야기 하면 그냥 귓등으로 흘려듣는 습관이 있다. 도무지 마음 속에 깊게 꽂혀서 자신의 게으름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정말 화를 끌어올려서 말해야 아이의 기고만장함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여태 여러가지 시도를 해본 결과 스스로 조절과 통제가 불가능한 부분은 부드럽고 좋은 말보다는 가끔 화를 내서 말을 하는 게 효과적이다. 

 

어제는 자기가 평소에 한 짓이 있으니 억울한 듯 우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금세 숙연해졌다.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길래 공부방에 불러서 앉혀놓고 나는 방안에 함께 있으니 화를 내고 나니 속이 좋지 못해서 밖으로 나갔다. 어색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꼭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푸는 게 습관처럼 되버렸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를 내면 내가 사과를 해야 맘이 편해진다.

 

모르는 애가 그런 행동을 하면 몰라서 그런다지만, 자기 입으로 항상 다짐하는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니 그걸 어떻든 바로 잡아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과정을 끈기있게 겪어나가도록 도와주긴 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잔소리하고 화내는 게 정말 싫다.

 

며칠 전에 뜬금없이 딸이 내게 말하기를, 어릴 때 그렇게 똑똑했으면 영재교육 시키듯 잡아서 공부 좀 시키지 왜 내버려뒀냐고 지나가는 말로 나를 은근히 탓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진짜 화가 났다. 초등생도 아닌 애한테 공부시킨다고 잡아서 여기 저기 돌리는 것 정말 옳지 못하다 생각해서 어릴 때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공부 공부'하며 유난을 떨지도 않았고, 학원 다니기 싫다해서 단 한 번도 공부하는 학원에 보낸 적이 없다.

 

그래서 편하게 실컷 놀면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더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싶어서 그 이야기 꺼내서 화를 좀 냈더니 입이 나왔던게 쑥 들어간다. 그리곤 이제 정말 공부에 신경을 좀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엄마인 내가 야단도 치지 않고 내버려뒀다고 나중에 내 원망할거냐고 물었다. 백 번 생각해도 다 제 잘못이다 싶으니 철없이 뻗치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 과정에서 감정을 실어서 기싸움을 했더니 금세 지치고 몸도 힘들게 느껴졌다. 시장바구니를 하나 들고 한밤중에 집을 나왔다. 어떻든 기분을 자연스럽게 바꿔야 하는데 그렇게 야단치고 같이 있으면 내가 또 이유도 없이 사과해야 풀릴 것 같으니 이젠 그러기 싫었다.

 

엊그제 딸이 먹고 싶다던 음식을 사러 갔더니 맛보기 음식을 먹어보니 가격대비 맛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대신 딸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샀다. 가쓰오부시 넣고 국물 만들어서 가츠동이나 돼지고기 덮밥을 할 계획으로 대패 삼겹살을 한 봉지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딸이 시장 가방을 받아들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고기를 냉장고에 넣고는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너스레를 떤다.

 

같이 사온 대파는 시장 가방 안에 그대로 두고 저가 좋아하는 삼겹살만 모셔다 놓은 것이다. 덩치는 나보다 큰데 마음은 아직도 어린 아이인 딸과 함께 가야 할 길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날은 철이 들었다 싶다가도 어떤 날은 저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아이 같다.

 

오늘은 학교 갔다 와서 바로 드러누워서 자버리면 또 야단을 쳐야 할까? 걱정이 된다. 자다가 밤에 깨서 놀다가 자는 고약한 버릇을 고쳐주려면 초저녁에 잠은 못자게 해야 되겠지.

 

**

한 봉지에 2천 원 딱지를 붙인 가지가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딸은 가지를 먹지 않는데 나는 가지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 가지 한 봉지 사다가 맛있게 볶아놨는데 단 한 젓가락도 맛보지 않아서 내가 다 먹었다. 혼자 그 많은 양을 다먹어야 한다는 게 싫기도 하고, 나 혼자 맛있게 먹자고 딸이 안 먹는 식재료 사가는 게 꺼려져서 가지를 앞에 두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왔다. 결국 딸이 좋아하는 식재료만 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인데, 나는 없고 자식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많은 게 아이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다른 선택도 가능하지만 결국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도 아이를 해롭게 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위한 선택보다는 아이를 위한 선택을 앞세우게 된다. 

 

거울 앞에서 몰라보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가끔 꿈을 꾸다 깬 것처럼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으니 이게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엄마로 살기 시작하면서 여자로서의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하여 내 마음 한 구석에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경과 함께 응어리진 뭔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간혹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내 젊은 날은 이렇게 지는구나.....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속상해서 눈물이 핑돈다. 

 

'흐르는 섬 <2010~2019>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의  (0) 2015.07.29
인스타그램  (0) 2015.07.27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0) 2015.07.18
염색  (0) 2015.07.16
7월 14일  (0) 2015.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