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고 사인회 한다길래 CD 한 장 사서 나도 줄을 섰다. 막상 내 차례가 다가오니 어찌나 떨리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했다. 카메라를 스텝에게 맡기고 기념촬영을 부탁했더니 내가 자리에 들어가서 제대로 서기도 전에 셔터를 눌러줬다. 표정이 정말 꽝이어서 내 얼굴도 가리고 싶을 지경이다.
며칠은 다니엘 앓이를 할 예정이므로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잘 나왔으면 매일 보려고 했는데 틀렸다. 아직도 가슴이 뛴다. 어쩜 저렇게 멋진 남자가 섹시하기까지 한지..... 설레서 오늘 잠은 다 잤다.
비발디의 사계를 먼저 연주하고 막스 리히터가 새로 쓴 사계까지 연주하는 동안 계절이 봄부터 겨울까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연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아낌없이 손뼉을 쳤다. 두 곡의 앙코르곡 다음에도 박수가 끊이지 않자 다니엘 호프는 재치 있는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앙코르곡조차도 황홀했다.
비슷한 나이에 저렇게 자신의 길을 뚜렷이 찾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이들을 눈앞에서 보며 남은 내 인생은 이대로 흘러가게 두는 게 아니라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새롭게 썼다는 두 번째 사계를 듣는 동안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 50년 중의 30년은 뭔가 아직 남아있는 인생의 못다 한 장을 펼쳐보아야 하리라는 생각이 일었다. 이대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인생인 듯 남은 생을 대충 마무리해버리기엔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다.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열정을 이대로 허투루 묻어버리기엔 아직 너무 젊다. 아직 남은 날이 너무 많다. 객석에 앉아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굳이 억누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두었더니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눈물이 났다. 그 순간 벅차올랐던 생각들을 모두 펼쳐놓을 수는 없지만, 여태 구태의연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고 가볍게 넘겨버린 시간을 더 연장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꼭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될지라도 오늘 뜻하지 않게 나를 자극한 연주회에서 내 머릿속을 꽝 때린 그 기분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이 생각이 씨앗이 되어 나도 뭔가 다른 길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따라가고 싶었다. 무작정 어린아이처럼 저 멋진 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세계 곳곳에서 울리는 그의 연주를 또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예인에겐 반하지 않는데 나는 종종 클래식 연주자에겐 홀딱 반하곤 한다. 이번엔 며칠이나 이 병을 앓을지 알 수가 없지만, 한동안은 밤마다 다니엘 호프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진 표정이랑 자세 엉거주춤 이상할 때 찍어준 스텝 정말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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