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옷방엔 하나둘씩 던져놓은 옷들이 무덤처럼 쌓여있었다. 손을 대기 곤란할 정도로 흐트러지거나 더러워지면 그걸 냉큼 치우지 못하고 망설이다 못 본 척 한다. 그리곤 어느 날 갑자기 기운이 돌면 미친 듯이 그걸 치우곤 하는 못된 습성이 생겼다.
이렇게 혼자 뚝 떨어진 섬처럼 살기 전에 내 방은 이렇진 않았다. 서랍 안마저도 반듯반듯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누운 자리에서조차 그게 떠올라서 벌떡 일어나서 성에 찰 때까지 치우고 나서야 잠들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게 될 줄이야. 옛날 사진이나 글을 적던 노트를 보면서 딸이 내게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이땐 완벽주의자에 결벽도 있을 것으로 보여. 지금은 적당히 어질러놓고 살아서 너무 인간적이고 나도 편하고 좋아. 이렇게 적당히 어질러져 있는 게 자연스럽고 좋아."
타고난 성질이 그랬던 것인지, 항상 반들반들하게 치우고 닦고 하시던 모친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꽤 오랫동안 나는 정리정돈이 안되면 머리 속 마저 복잡하게 느껴져서 주변 정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도 남지 않을 만큼 모든 일을 처리한 다음엔 뿌듯한 기분이 들기보단 어쩐지 이젠 할 일이 없으니 내 존재가 사라져야 할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핑곗거리가 생긴 뒤로는 적당히 해야 할 일들을 남겨놓고 지낸다. 언젠가 읽겠다고 책도 쌓아놓고, 언젠가 다 하겠다고 설거지도 쌓아놓고, 언젠가 정리하겠다고 옷방도 한껏 어질러놓고 산다.
오늘은 설거지도 다 했고, 문 열면 켜켜이 쌓인 옷가지 사이에서 도깨비라도 한 마리 나올 것 같든 그 무시무시하든 옷방 정리도 끝냈다. 20대 중반에 새로 사서 쓰던 낡은 서랍장을 버리지 못해 계속 손봐서 쓰던 걸 이제는 꼭 버려야겠었어 서랍장 안에 있던 옷가지도 정리했다.
낡은 이불과 자리, 방석, 아이가 자라면서 이미 버렸어야 했던 옷가지를 종량제 봉투와 종이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그리하여 오늘 160ℓ의 쓰레기를 버렸다.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오래된 물건, 낡아서 버렸어야 할 물건들을 왜 그리도 많이 안고 살았는지......
수학여행 간 딸이 내일 돌아오면 옷방을 보고 깜짝 놀라겠지. 오늘 3박을 하는 교토 숙소로 이동한다는 톡을 오후에 보낸 뒤 아무 소식이 없다. 새로 옮긴 이번 숙소는 괜찮은지 저녁은 먹었는지 물었더니 확인을 하지 않을 걸 보니 그 호텔은 와이파이가 안되는 모양이다. 나흘간 혼자 지내는 내가 신경 쓰여서인지 아침에 먹은 것부터 오후에 놀러 다니며 본 것, 기념품 산 것 일일이 사진 찍어서 보내더니 오늘 오후부터 어쩐지 조용하다.
열흘 남짓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는 동안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늘도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오후에 커피를 두 잔이나 내려서 마셨다. 한동안 공급이 끊겼던 카페인이 대량 투여되자 괴력이 솟아났다.
이불 커버를 벗겨서 세탁기에 넣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몇 시간 동안 옷방에 붙어 앉아있었다. 하나씩 정리 하다 보니 세탁기에 한가득 돌릴 빨랫거리가 생겼고, 종량제 봉투 20ℓ 4개에 75ℓ 하나까지 헌 옷과 쓰레기로 꽉꽉 채워서 버렸다.
낡은 무덤 하나를 정리하고 나니 딸이 카톡을 보내온다. 숙소인 교토의 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근처 마트에 쇼핑하러 다녀왔다며 이런저런 자랑을 늘어놓는다. 오래전 우리 과 대학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갔는데 나는 부모님께 부담 드리는 게 싫다고 졸업여행도 가지 않고 하숙집에 남아있었다. 필요 이상의 양보나 절약은 그다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딸은 그렇게 좋아하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여행 가기 전에 새 신발 사고, 새 옷도 사고 용돈도 두둑하게 쥐어 보낼 수 있어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왜 그때 절 거기 보내주지 못했냐는 아쉬운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수학 여행비를 기꺼이 지원해준 친구 덕분에 여러 번 갔던 제주나, 그다지 가고 싶어 하지 않던 서울가는 여행팀에 합류하지 않아도 되어서 저렇게 즐거워하는 딸의 종달새 같은 메시지를 하루에 몇 번씩 받고 있다.
오늘은 밀린 숙제 하나를 끝내서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다. 어깨가 쑤시고 아픈 게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다. 약 기운에 취해서 졸다가 잠들고, 깨서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를 반복하다 보니 내일로 3박 4일의 수학여행이 끝날 때가 되었다. 얼른 이 지겨운 감기가 나아야 밖으로 나다닐 수 있을 텐데......
'흐르는 섬 <2010~2019>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2일 (0) | 2017.05.02 |
---|---|
4월 29일 (0) | 2017.04.29 |
4월 25일 (0) | 2017.04.25 |
4월 20일 (0) | 2017.04.20 |
아픈 게 정말 싫다. (0) | 2017.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