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토요일
애초에 한라산을 등반할 계획은 없었다. 혹시나 마음 내키면 한라산 아래라도 가보고 올까 했다. 가장 거리는 멀어도 완만한 코스라는 말만 듣고 성판악 코스를 선택했다. 조금만 걸어보고 힘들면 내려올 생각을 하고 도시락 준비도 없이 과자 몇 개에 물만 준비해서 한참 걸었는데 겨우 1.3Km를 지났다.
성판악 코스 왕복 19.2Km 8시간- 9시간 30분 소요. 우리는 9시간 30분 걸렸다. 동네산도 타지 않는 완전 초보 둘이서 엉금엉금 가다 보니.....
지영이는 다리 아파서 못 가겠다고 울기 시작했고, 아이를 달래 중간에 몇 번씩 쉬고 걸으며 생각했다. 여름 극기훈련 코스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아이만 잘 구슬려서 끝까지 갈 수 있다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틈에 휩쓸려 꼭 정상까지 가보고 싶었다.
등산로는 인산인해였다. 진달래밭까지 1시 이전에 도착하지 않으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통제하기에 그곳까지 1시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 쉬면서도 시계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나도 그 바람에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오래 퍼질러 앉아 쉬지도 못하고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은 젖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등산객의 숨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내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도 앞서가는 사람에겐 그렇게 들렸을 테다.
'죽어도 올라가서 죽을 테야.....'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한데 우선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다. 올라가면 어떻든 내려와 질 거라는 생각 외엔 할 수가 없었다. 더 많이 생각하면 지영이가 애초에 다리 아파서 못 걷겠다고 주저앉아 울 때 포기했어야 했다.
계속 체력의 한계를 반복적으로 느끼면서도 자신에게 호소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정상에 다녀올 수 있으면 앞으로 내가 못해낼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의 한계를 쉽게 긋지 말자고 나를 달래고 얼러서 결국 힘들게 진달래밭까지 갈 수 있었다.
9시 20분에 출발하여 7.3Km 지점인 진달래밭까진 3시간 20분가량이 소요되었다. 20분은 지영이가 울어서 달래느라 걸린 시간이었고 중간중간에 자주 쉬어서 훨씬 단축될 수도 있었던 시간이 그렇게 늘어져버렸다. 성판악 코스는 왕복 20Km가량에 9시간은 걸린다 했으니 그만큼 걸었으면 잘 걸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진달래밭까지 왔는데 견딜만했다. 도시락 준비는 안 했어도 다행히 매점에서 컵라면을 팔았다.
지영이는 컵라면을 먹고 좀 기운이 났는지 한동안은 생글거렸다. 하지만 진달래밭에서 백록담까지 남은 2.3Km가 문제였다. 가파른 돌길이 올라오면서 지친 다리를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걸음이 느린 아이를 동반한 사람은 오후 1시 마감 시간 이전에 빨리 나서라는 방송을 듣고 라면을 먹고 부리나케 다시 내달렸다.
정상에 올라도 산 위에선 기상 변화가 워낙 심해서 백록담을 볼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바람을 타고 몰려드는 구름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삼순이가 삼식이랑 만나는 즈음이라고 생각되는 자리에서 구름이 우리를 관통하자 아이는 신이 나서 구름을 잡는다고 손뼉을 치며 팔딱거렸다. 지치고 땀에 젖은 얼굴이 그제야 웃음이 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해 볼 수 없는 구름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야...."
그 말이 재밌었는지 내려오는 길에도 지영이는 구름 목욕을 하고 싶다고 계속 쫑알거렸다. 정말 구름과 바람 속에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정상에 올랐다.
한쪽에선 이렇게 구름이 몰려오고 있고
한쪽은 또 이렇게 하늘이 파랗게 갰다.
2시 30분 이후엔 강제로 정상에서 하산을 시키기에 진달래밭까지 서둘러 올라왔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정상까지 올라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분분히 구름이 피어오르고 하늘을 덮어 빛을 가리기도 하더니 백록담 주변엔 어느새 구름이 걷혀 시야가 맑았다. 물은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한라산 정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너무 지쳐서 삐져 있던 아이를 달래서 기념촬영을 했다.
마침 전날(금요일) 제주 시내에 있는 치과에서 흔들리던 앞니 하나를 더 뽑았다. 그래서 웃으니 아랫니 빠진 게 선명하게 보인다.
이젠 다시 내려가는 코스다. 올라와서 안 죽었으니 살아서 내려갈 수 있겠지라는 심정으로 걸음을 디뎠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풀어져서 내려가는 길에 내 몸은 더 끔찍했다.
중간에 몇 번씩 자리를 틀고 앉아 쉬어야만 했다. 국립공원은 금연구역인데 저기 지영이 옆에 군복 입은 나쁜 쉐이 우리가 쉬지도 못하게 애인이랑 등산 와서 담배를 피워댔다. 그것도 사람들이 함께 쉬는 공간에서 옆에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한 대 패주고 싶었는데 더러워서 참았다. 올라갈 때도 꼭 저런 나쁜 쉐이 하나가 있었다. 사진 찍어서 신고해버리고 싶었는데 성질 죽이느라 그것도 참았다.
그래도 꼭 한마디 해야겠기에 산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쫑알거렸는데 끝내 내 옆자리에서 피면서 담뱃불을 끄지 않았다. 그리고 나 외엔 아무도 잔소리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담뱃불로 인해 그렇게 수도 없이 산불이 나는데도.
하늘도 보고 물도 마시고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걸어서
시발점이었던 종착점까지 몇 Km 남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사슴을 만났다. 곱게 생긴 꽃사슴이었다. 하도 내려오던 걸음이 늦어서 뒤에서 내려오던 많은 등산객들이 차례로 우리를 추월해 가고 등뒤로 사람들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 무렵부터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멧돼지라도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얼마나 했던지 노란 꽃사슴이 곁길에 앉았다가 우리를 보고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것을 보고 순간 들개가 아닌가 하고 화들짝 놀라 기겁을 했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동물을 보는 것이 나도 신기했다. 아이에게 산중에서 동물을 볼 기회가 주어진 것이 너무 좋아 한참을 보고 있었더니 우리보다 더 뒤에 내려오던 한 가족이 마침 내려와 사슴을 함께 보게 되었다.
산장지기가 뒤따라 내려오며 우리가 마지막이니 빨리 내려가라고 종용을 했다. 나는 다리가 풀어져서 절룩거리며 발을 끌고 가다시피 하던 중이라 도무지 해지기 전에 산 아래까지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영이는 다리 아프다고 울먹거리고 내 다리는 그보다 심각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숲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나는 아이가 자꾸만 주저앉으려고만 해서 사슴을 보았으니 사슴을 잡아먹고사는 멧돼지도 곧 나올지도 모른다는 거짓말을 했다.
아이는 낯빛이 변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무사히 내려가겠다 싶었는데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짐승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멧돼지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몸이 꽁꽁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저 멀리 출구가 보였다.
산에서 내려오니 7시였다.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중간에 정상에 가기를 포기하고 내려간 사람들도 많은데 다리를 끌고 왔거나 말거나 정상까지 다치지 않고 잘 다녀왔으니 우리 모녀의 극기 훈련은 이만하면 대성공이다.
땀 많이 흘리고 탈진한 상태로 성판악 입구에서 기념촬영. 너무 지쳐서 표정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만한 추억 남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등산화랑 등산복도 없었다. 대충 입은 옷에 불편한 신을 신고 전날 쐐기에 쏘인 다리에 통증을 참으며 평소에 많이 걷지 않던 내가 무사히 정상에 올랐다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신도 놀랐다. 마음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는데 요즘은 그 마음을 먹지 못해 못하는 일 투성이다. 저 사진을 보면서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과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얻을 수 있었던 성취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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