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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산책길

by 자 작 나 무 2020. 6. 12.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비 온다는 일기예보만 없었어도 이번 주에는 혼자라도 제주도에 한 번 가볼까 생각했다. 딸이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더니, 제주도는 목요일부터 장마처럼 계속 비 내릴 거란다. 비 안 오는데......ㅠ.ㅠ

 

 

 

 

비 안 오는데 집에만 있으니 살짝 약 오른다. 동네 산책이라도 해야지......

 

 

 

 

 

바닷가에 나서니 언제든 비가 쏟아져야 할 정도로 대기가 습하다.

 

 

 

 

 

 

 

 

 

 

 

 

젊은 남자 사람 넷이 앞서서 걸으니 나 혼자 걷는 것보다 어쩐지 덜 심심하다. 근처 호텔에 단체 세미나를 온 모양이다. 우리 동네는 저런 젊은 이 시간에 산책하는 젊은 남자 사람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의 젊은 남자는 이 동네를 떠난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걷던 길이었나..... 사람들 많이 마주치는 것 피하려고 인가가 없는 길을 골라서 걷는데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간격을 두고 걷는 것조차도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양말이라고 신은 게 발목을 덮어주지 못하니 금세 뒤꿈치가 까져서 아프다. 역대급으로 살이 확 쪄서 고무 치마 말고는 맞는 옷도 없다....... ㅠ.ㅠ

 

 

 

 

습기 가득한 구름이 바람 따라 몰려서 저 너머 섬으로 흘러드는 걸 보고 앉아있었다.

 

 

 

 

한산도에 늦게까지 배가 나드는 것을 보고 이런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이쪽 산책길에 종종 마주치는 어르신께서 산책 마치고 돌아 나오시면서 내가 앉은 벤치 빈자리에 앉으신다.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어리바리하고 있는데 그래도 앉으신다.

 

 

 

 

그리곤 자백하는 약이라도 드신 것처럼 막 이야기를 털어놓으신다. 같은 학교에서 거의 2년 동안 가끔 인사도 드렸지만, 영어 선생님이셨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이었는데 단숨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내가 이야기 잘 들어주게 생겼나?

 

통영 토박이며 이 동네에서 익숙한 학교에 다닌 이야기며 대학원, 직장, 자녀 유학 이야기 등등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내신다. 

 

학교에서 그렇게 봐도 나는 외지 사람인 줄 아셨단다. 너무 이지적이고 이국적으로 생겨서 통영 사람 아닌 줄 알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내가 통영 사람이라 해서 놀라셨다며 반가워서 마음을 터놓고 싶으셨나 보다.

 

암 투병하던 친구분의 건강관리 삼아 항상 같이 산책하는데 오늘은 친구분이 나오지 않으셔서 혼자 걸으셨다며 요즘 농사짓는 땅에서 나오는 채소나 농산물 좀 나눠주고 싶다며 집을 알려 달라 신다.

 

과한 친절함은 받을 수 없다며 인사하고 헤어졌다. 

나와 대화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들의 시선과 의견을 들었다. 나도 조금은 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나 혼자 애 키우며 전전긍긍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조금 꺼냈더니 화들짝 놀라신다. 

 

다음엔 밥을 사주시겠다며 내가 가려던 마트까지 차도 태워주신다. 이제 이 산책길은 끊어야 하나...... 이 산책길에서 열댓 번 마주쳤어도 묵례만 하고 지나쳤는데 오늘 제대로 걸렸다. 수원 영통 고층 아파트 많은 동네에 댁이 있으신데 연세 많으신 모친의 병세를 돌보느라 혼자 이 동네 와서 학교생활을 하셨던 모양이다. 

 

윗동네에서 학교 생활과 함께 고액과외까지 하며 돈 잘 벌어서 딸 셋 다 유학시킨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싶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앞서 걸으며 서로 얼굴만 훑고 지나던 낯선 사람이 차라리 나는 편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아는 이런 좁은 동네에서 내가 얼마나 조용히 숨만 쉬고 살았으면 토박이인 나를 다들 외지 사람으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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