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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해 질 무렵

by 자 작 나 무 2020. 8. 24.

일 시작한 지 며칠 지나니까 피곤해서 눈 감고 있다가 저녁 먹을 시간을 계속 놓친다. 아침까지 굶을 자신은 없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읍내에 가려고 정문으로 나선다.

내가 살던 곳보다 훨씬 볕이 뜨거운 그곳의 열기가 해 질 녘에도 얼굴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몇 걸음 옮기면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내가 어디서 무얼하는지도 잊고 싱글벙글 웃었다.

 

8월 18일

밥 먹기 직전까지 마스크 쓰고 종일 일하고 나니 지치기도 하고, 더워서 입맛 떨어질 정도여서 저녁에 학교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이틀 전에 강변 산책길 걷다가 양말이 짧아서 맨살에 계속 닿던 운동화에 쓸려서 뒤꿈치가 까졌다. 다시 운동화 신고 걸으려면 양말이 필요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 한 켤레 사러 동네 마트에 갔다.

 

물집이 너덜너덜해져서 쓰라린데 샌들 신고 갔으면 발이 그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깜박하고 운동화 신고 또 상처에 신발이 닿아서 발을 질질 끌며 마트를 배회하다가 양말 한 켤레 고르고 김밥과 음료수를 샀다.

 

마트에서 계산하고 나오자마자 마트 앞 도로에서 바로 새 양말을 갈아신었다. 마트 직원인지 근무복을 입은 한 남자가 마트 바깥 어딘가에서 걸어오며 나에게 말을 건다. 길에서 양말 갈아신는 여자가 신기해서?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트 밖에서 나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을 걸어서 뭔가 대답하고 한쪽 발씩 깡충 거리며 양말을 갈아신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김밥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우고 평소 같았으면 먹지 않았을 생크림 빵까지 순식간에 먹고 그대로 기절한 듯 매트리스에 엎어져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도무지 손도 까딱할 수가 없다. 탄수화물 폭탄을 섭취한 뒤 가만히 누워서 쉬면서 생각해보니 마트 앞에서 이상하게 친절하게 말을 걸며 나를 쳐다보던 그 사람의 눈빛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반대쪽 양말을 갈아신으면서 끝내 숙인 허리를 펴지 못하던 나를 그렇게 굽어살피듯 바라보던 그 남자의 시선이 내 눈과 딱 마주친 순간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만 보이니까 혹시 예뻐서 쳐다보았을까? 혼자 웃겨서 한참 웃다 생각해보니 내가 입고 나간 목선이 적당히 드러나는 블라우스는 허리를 숙이면 본의 아니게 엉뚱하고도 과한 친절(?)을 베푸는 옷이다. 얼떨결에 허리를 숙이고 양말 갈아신느라고 내 블라우스가 베푼 친절을 그제야 알아챘다.

 

이 좁은 동네에서 자주 갈 수 밖에 없는 마트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앞으론 좀 더 둘러서 가더라도 다른 구역에 있는 마트에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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