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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태풍 마이삭이 지나가는 시간에

by 자 작 나 무 2020. 9. 3.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다.

집중할 것이 필요해서 지난 사진 중에 음식 만들어 먹은 것 골라서 포스팅하다가 냉장고에 든 생새우 생각이 났다. 딸내미가 좋아하는 해물 된장 끓여주려고 샀는데 어제 아침 일찍 가버려서 만들어 먹일 시간이 없었다.

 

그냥 두면 신선도가 떨어질 것 같으니 오늘 밤에 꼭 먹어야겠다.

새우를 까다 보니 알이 굵고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새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딸내미에게 만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로 굵고 크다.

 

새우 손질한 것에 대파, 양파, 당근, 감자 있는 대로 냉장고에서 나오는 채소는 빠짐없이 넣고 새우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매운 고추를 듬뿍 갈아 넣었다.

 

청양고추씨는 좀 빼고 갈아야 할 것 같아서 손질하다가 손에 매운 것이 묻어서 따끔거리는데 아무 생각 없이 콧방울을 만졌다가 얼굴이 벌게졌다. 물로 몇 번 씻어내도 루돌프 코 같다. 게다가 아프기까지.......

 

 

튀김가루, 부침가루 반반 섞고, 달걀 하나 깨서 반죽한 뒤 기름 넉넉하게 두르고 튀기듯 굽다 보니 기름이 막 튄다. 감자와 당근 채칼에 밀다가 손가락 하나 피부가 살짝 벗겨져서 아프다. 매운 고추에 피부 벗겨진 데에 기름까지 튀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뭔가 꼭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바깥에 비바람 치는 소리가 너무 무서울 정도여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뭔가 다른 데 신경 쓰려고 벌인 일이어서 그 당황스러움조차도 나쁘지 않다. 혼이 빠지는 것 같다. 그래서 잠시나마 소리가 덜 무섭다.

 

 

손이나 얼굴이 엉망이 된 상태로 그렇게 구워낸 새우전 한 접시를 다 먹었다. 청양고추를 많이 갈아 넣어서 매콤한 것이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이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어서 그냥 다져 넣으면 입안에서 청양고추 조각과 마주칠까 봐 믹서기에 갈아서 입자를 작게 만들어서 넣으면 괜찮다.

 

우여곡절 끝에 자정이 넘어서 먹는 새우 전도 맛있다. 내 입맛이 여전한 걸 보니 코로나 19는 안 걸린 모양이다. 어제까지는 잠옷도 대충 하나만 걸치고 잤는데 오늘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밖에 갑자기 나가도 민망하지 않을 잠옷으로 바꿔 입었다. 샤워부터 하고 전을 부쳤더니 온몸에 기름 냄새가 잔뜩 뱄다.

 

태풍 온다고 겁먹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 태풍 매미를 호되게 겪은 다음엔 저 정도 거센 비바람 소리엔 나도 모르게 긴장된다. 무서워서 불도 못 끄겠다. 휴대폰 충전 100%, 안경 끼고 지갑 챙겨서 나갈 준비 완료! 밤참도 먹었겠다...... 유리창 부서지면 옆방으로 가거나 거실로 도망가면 되겠지. 설마 밖으로 대피해야 할 일까지는 생기지 않겠지. 

 

 

요리용 장갑을 끼고 했어야 했다. 데인 곳엔 화상연고 바르고 손가락 벗겨진 곳엔 콘트라투벡스를 발랐다. 딸이 있을 땐 식은땀 흘리며 긴장하는 딸 껴안고 괜찮다고 달래서 재웠는데, 혼자 있으니 무섭다. 불이 왔다 갔다 한다. 정전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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