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기숙사 입소가 10호 태풍 하이선의 북상으로 월요일로 미뤄졌다. 월요일은 전체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지만 월요일에 정상 출근해야 하니 일요일에 나 혼자 기숙사에 들어가서 태풍 전야를 보내게 됐다. 다 좋은데 인터넷 안 되는 숙소에 혼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공포 영화라도 한 편 찍게 되지 않을지 걱정 반 설렘 반, 흥미진진한 일요일 밤이 기대된다.
(이 글 쓰고 나서 한 시간 가량 지난 뒤에 일요일에 기숙사에 들어오지 말라고 연락왔다. 다행이다......)
이불 빨래는 차례로 다 했고, 오늘 마지막 빨래는 홈 드라이 세제로 세탁할 까다로운 옷만 남았다. 딸이 돌아와서 같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 기분에 금세 흐물흐물해진다. 딸도 고작 다섯 달 정도 다음 학기에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혼자 살림을 간단하게 할 것이고, 나도 딱 그만큼 그 동네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뭔지 모르게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일이 돌아가는 것 같아 어려운 시기에 한시름 놨다.
알아서 다 챙겨간 줄 알았던 살림살이를 챙겨가지 않았다고 해서 챙겨줄 것을 뒤적이다 보니 오래돼서 버려야 할 물건을 언제 버려도 되니까 가져다 쓰라고 주기는 싫어서 저렴한 가격에 새 그릇 몇 개를 온라인으로 샀다. 딸내미 방으로 배달되게 해놓고 보여주니 새 살림살이 산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음식 만들어서 함께 먹으면서 느끼는 안정감 대신 나를 평온하게 버티게 해 줄 새 지지대를 이젠 개척해야한다. 딸은 내가 가라앉아 있을 수 없게끔 에너지를 퍼 올려서 활동하게 만드는 존재다. 어떤 이는 끊임없이 번거롭게 하는 자식 때문에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기도 하던데, 나에게 그런 존재가 있어서 감사하다. 덕분에 게으름을 걷어내고 열심히 살 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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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집 안에 있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거리가 없는데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다. 딸은 학교에서 친구와 학식 먹고 캠퍼스 한 바퀴 산책하며 해 질 녘에 걸으니 선선한 것이 좋더란다. 나도 누가 못 나가라고 붙잡는 사람도 없었는데 괜히 고집스럽게 집에만 있었더니 자꾸 먹기만 반복하고 식충이가 된 기분이다.
집에서 기계로 내린 커피만 마시는 게 싫어서 동네 빵집 카페에서 커피와 빵까지 배달시켜서 잘 먹었는데 기분 좋게 커피 마시고 돌아서니 금세 또 우울해진다. 나가려면 씻고 옷도 챙겨입어야 하니 귀찮은데 오늘쯤은 동네 한 바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일요일에 집 나설 때까지 꽉 채워서 꼼짝 않을 생각이었는데 시시각각 우울감에 기분이 자꾸 가라앉으니 방법은 어딘가 나가서 돌아다니다 오는 수밖에 없다. 딸내미 필요하다는 물건 산다는 핑계로 이 무거운 몸과 마음을 끌고 오늘은 기어이 문밖에 나가봐야지.
아니야, 나가면 기운 빠져. 집에서 맛있는 거나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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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멀티비타민, 오메가3, 유산균 등 챙겨 먹던 건강기능식품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꼭 잊지 말고 잘 챙겨 먹어야겠다. 오래 버티려면 잊지 말아야 한다. 괜찮으면 자꾸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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