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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11월 11일

by 자 작 나 무 2020. 11. 11.

오랜만에 강변 산책길을 걸었다. 하루에 15,000걸음은 채우고 싶은데 14,000걸음 걸었다. 뭔가 잘 안 될 때는 완전히 그만두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몰라도, 잘 안 되는 지점에서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오늘은 따뜻하게 입고 가볍게 걷고 싶은 만큼만 걷다가 돌아오려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조금 어두워질 무렵이었지만 바람이 이전만큼 차지 않아서 상쾌하고 좋았다. 어제 운동장 한 시간 도는 동안 반복되는 트랙에서 느낀 갇힌 기분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시도와 달리 열린 결말이 있는 시도가 한결 나를 자유롭게 했다.

 

남 선생님께서 이웃집에서 얻었다는 무김치 한 통이 이틀 동안 밖에 있었다더니 벌써 쉬었다. 기숙사에서는 냉장고를 사용할 수 없지만, 연구실 냉장고에 김치가 있으니 간혹 퇴근 시간이나 퇴근한 뒤 다 떠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김치 때문에 라면을 먹기도 한다. 오늘은 남 선생님과 함께 컵라면을 먹었다.

 

그게 뭐라고 어제 혼자 청승맞게 먹고 싶지 않은 저녁을 먹고 혼자 꾸역꾸역 운동장 돌았던 것보다 기분이 훨씬 나았다. 누군가와 아주 사소한 대화라도 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새삼스럽게 느낀다.

 

딸이랑 함께 지낼 때 우리 삶이 덜 지루하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가 함께 나누는 사소한 대화와 함께 음식을 먹는 시간 덕분은 아니었을까.

 

길에서 혼잣말로 아예 드라마를 찍고 왔다. 세탁기에 있던 빨래를 꺼내서 건조기에 넣으면서 본의 아니게 이미 건조기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남의 빨래를 세탁통에 건져놓게 되었다. 언젠가 기숙사 생활 초창기에 세탁기에 돌아가던 내 빨래가 없어져서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찬바람 좀 쐬고 다녔다고 또 목이 간지럽다. 도라지청 사 놓은 것을 죄다 연구실에 두고 왔다. 건너가기 귀찮아서 좀 널브러져 있다가 근력 운동하러 체력단련실 가려고 했는데...... 귀찮아도 다시 연구실로 출동~

 

오 선생님은 오늘 야자 감독이어서 남아계셨다. 나 먹으라고 냉동실에 핫도그 사놨다며 케첩도 챙겨주신다. 오늘 이미 빼빼로 데이 핑계로 가래떡도 먹었고, 어제 받았던 찰시루떡을 그렇게나 먹었는데 또 핫도그를 먹으면 매일 체중이 늘어나는 내 식습관을 고칠 수 없을 것 같다. 감사하지만 내일 먹겠다고 감히 음식을 거절했다.

 

잠자리에 누워서 거절한 핫도그 생각나면 어떡하지? ㅎㅎㅎ

 

노트북을 오랜만에 켰더니 그 사이 와이파이도 안 잡히고 엉망이다. 한 일주일은 노트북을 한 번 꺼내지도 않고 지냈던 모양이다. 지난주엔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마땅한 프로세스가 없어서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약간의 시간이 걸려도 너무 자주 달그락거리지 않게 잘 정리하고 그때문에 몸이 끄달리는 일이 없게 앞으로도 멘털 관리를 잘해야겠다.

 

다시 가볍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

낮에 새로 저장한 곡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찾았다.

점심 때 급식소에서 받은 빼빼로를 들고 양치하러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휴대폰을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다. 급식소에서 들고 나온 것 같은데 방 안에서 찾을만한 곳은 다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믿지 못하는 고약한 습관이 발동되면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도 거짓말처럼 내 손에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깜박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기로 하고 일단 기숙사에서 나왔다.

 

다시 급식소로 향하며 기억을 되짚어보니 빼빼로라는 변수가 있었다.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손에 함께 들고 있던 휴대폰도 겹쳐서 놨을 것이다. 다시 기숙사에 가 보니 과연 그렇게 빼빼로 상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여전히 외출할 때 입었던 외투 주머니며 출근할 때 들고다니는 에코백 안을 아무리 뒤져도 이어폰이 없다. 내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 위주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분명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었던 것 같다. 외투 주머니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 중에 주머니가 있는 옷이...... 앗~! 세탁기에 조금 전에 넣은 체육복 바지 주머니!!!

 

안타깝게도 세제 풀린 물에 이어폰은 물 세례를 충분히 맞아서 수해를 입은 상태였다. 기숙사 화장실에 붙박이로 붙은 헤어드라이어로 열심히 말려서 아이폰에 꽂아보니 한쪽만 들린다. 그나마 한쪽도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찬바람으로 지극정성 말려본다. 이번엔 대충 양쪽이 어눌한 것 같지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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