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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11월 18일

by 자 작 나 무 2020. 11. 18.

*

책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나 문장을 종이에 옮겨 쓰곤 한다. 다시 읽게 되는 경우는 그 종이가 공책일 때뿐이고 손에 잡히는 종이에 옮겨 적었을 때는 쓰는 순간 펜을 놀리는 손의 감각과 함께 기호나 그림처럼 변환되어 내게 머문다. 세세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지만, 색깔과 향취를 기억하듯 글의 느낌이 내 무의식에 한 부분 남게 된다.

 

요즘은 간혹 책을 소리 내 읽기도 한다. 혼자만의 공간인 기숙사 방을 얻어 살게 된 뒤, 해가 빨리 지고 밖에서 걸으며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어 생긴 시간에 간혹 전자책을 읽다가 소리 내어 몇 장을 읽곤 한다.

 

말하는 일을 하지만 누군가와 하는 대화와는 종류가 다르므로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는 혼자 외딴 길을 걸으며 혼잣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와 다른 형태로 목소리를 내고 내가 들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을 때, 눈으로만 읽던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본다. 피곤해서 힘에 부치기 전까지 몇 문장을 읽다 보면 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부정확하던 발음도 교정할 수 있고 수업 중에 어떤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할 때 한결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무표정한 순간, 피곤할 때의 표정을 누군가에게 드러내야 할 때 내 표정이 너무 엄숙하거나 짜증 섞였거나 힘들어 보이면 상대에게 피로감을 준다. 굳이 표정으로 감정을 노출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살짝 감정을 가다듬고 표정도 다듬어본다.

 

특별히 슬프고 괴로운 감정에 사무친 순간이 아니면 산책길에서 인상 쓰고 걸을 이유도 없다. 어릴 때 내 무표정이 너무 침통하고 우울해 보여서 일가친척들이 거울 보고 웃는 연습 좀 하라는 말까지 했다. 

 

내 무표정이 얼마나 무거운지 확인한 다음부터는 표정 조금 바꾸는 것 힘들지 않으니 되도록 그 무거움은 걷어내도록 노력한다.

 

그 작은 노력이 일상화되어 평소에 생글생글 잘 웃는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칸막이 너머로 점심을 먹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맛있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왜 그렇게 무겁고 심각하고 우울해 보이는지 내가 웃으며 음식을 먹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그토록 무겁고 엄숙해야만 하는지? 나는 맛있는 것 먹을 때 기분 좋으니까 웃고 싶은데. 배고팠다가 음식 먹으면 기분 좋아서 웃고 싶은데. 나 혼자 웃으니까 어쩐지 이상하다. 삶이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웃을 수 있을 때는 좀 웃는 것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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