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지나서, 통영국제음악제 가을 시즌 음악회에 갈 때 주로 그 옷을 입었다.
몸에 살짝 밀착되는 짧은 원피스. 입고 서면 허벅지가 반쯤 드러나고, 앉으면(내 기준에) 살짝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비교적 짧은 원피스다. 그런 길이의 원피스나 스커트는 대부분의 내 일상에서는 환영받을 수 없었다.
20대에는 과하게 옥죄는 부모님의 편견에 어쩔 수 없이 동조하여 미니스커트를 꿈꾸는 것은 일탈에 속했다. 20대에도 무릎에서 약간 올라간 청치마를 몇 번 입어본 것이 전부였다. 조금 더 짧은 치마도 입으면 어떨지 궁금해서 치마허리를 한 번 접어서 입어 본......
처음으로 자유로웠어야 했을 내 20대는 독재자 스타일의 부모라는 사슬에 묶인 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해 가을은 조금 짧고 실루엣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 원피스를 입을 수 없을 만큼 살이 붙었고, 어느 가을은 음악회 도중에 몸이 긴장하여 터져 나오는 참을 수 없는 기침 때문에 다시 그곳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올해는 코로나 19 때문에 음악회에 가는 것은 계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출근하면서는 입을 수 없는 옷을 음악회에 가면서는 입을 수 있다. 평소에 입을 수 없는 옷을 차려입고 음악회에 가는 것은 나에겐 즐거운 외출이고, 나름 억눌린 욕망의 발산 장이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음악가들의 손으로 연주하는 곡을 직접 보고 듣는 즐거움은 물론이고 가끔 평소엔 나름대로 금기시 된 옷차림으로 나갈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물론 위에 트렌치코트나 겨울 코트를 덮어 입고 가긴 했어도 나도 짧은 치마를 입어볼 유일한 기회였다.
얼마나 많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자랐던 것인지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일탈은 그 정도였다. 그나마 몇 해 전에 처음 미니스커트 사서 딱 한 번인가 입어보고 그대로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런 옷차림을 즐길 만큼 익숙해지기엔 현실적 장애가 많다.
오늘 집에 와서 오랜만에 이 계절에 입던 옷이라고 한 번 꺼내서 입어봤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나이도 조금 들어 보이는 내가 입으니 어쩐지 남사스럽다. 예쁘다고 같은 디자인의 원피스를 색깔 바꿔서 두 개나 샀던 것으로 보아 나는 그 옷을 사고 가끔 입으면서 꽤 정신적인 해방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젠 음악회 핑계로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음악당에 고작 다녀오는 정도에도 입을 수 없는 이 옷을 만지작거리며 나이를 실감한다. 나이가 든다고 용기가 더 많이 생기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용기 없이는 짧은 원피스도 입을 수 없는 소심한 나를 내가 만든 것만은 아니다. 성적인 부분에 대한 억압이 오히려 표면적으로 드러난 노출보다는 정신적인 발산과 노출을 갈망하게 했던 것 같다.
조금 짧은 옷을 입으면 하는 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당하고, 조금 짙은 색 립스틱을 발라도 지적당하고, 화장이 조금 진해도 눈총을 받는다. 딱히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제 뭘 해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나이가 됐다.
코로나 19만 아니었다면 올가을에 한두 번쯤은 그 원피스를 입고 나갔을까. 적어도 뱃살은 없어야 부담스럽지 않은 이 원피스를 앞으로는 영영 입고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 집에서 컴퓨터 두드리면서 짧은 원피스를 입고 웃기는 글을 쓰고 있다.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나는 이렇게밖에 자신을 표현할 수가 없다. 뭐든 글로 배워서 글로 푸는 방법밖에.....
'흐르는 섬 <2020~2024> >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How long will I love you (0) | 2020.11.21 |
---|---|
인도 몬순 말라바 (0) | 2020.11.21 |
보고 싶어서 (0) | 2020.11.19 |
11월 18일 (0) | 2020.11.18 |
비를 맞고 돌아왔다. (0) | 2020.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