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쯤에나 시간 내서 딸내미 자취방에 있던 짐 빼는 것을 도와주시겠다던 강 선생님께서 오늘 낮에 시간을 내주셨다. 차가 없으니 번번이 신세를 진다. 이제 겁 없이 차를 사야 할 시점인가?
이달 말에 기숙사에 갈 때 딸내미 짐은 내가 같이 시외버스 타고 들고 가야 할 판이다.
낮에 강 선생님 차에 짐을 싣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 선생님 부친께서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그 다급하고 가슴 답답한 시간을 겨우 건너서 집에 도착하여 급히 짐을 내려놓고 부산으로 떠나셨다.
올해 아흔이신 강 선생님 부친께서 뭔가 드시다가 목에 걸린 뒤에 심정지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신 모양이다. 예정대로였다면 주말에 딸내미 짐은 옮기지 못 할 뻔했다. 어찌나 죄송한지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2년 전에 강 선생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부산 빌라에서 내가 한 달 동안 딸과 함께 지내면서 편하게 연수를 받았다. 수술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내 몸 상태가 좋지 못해서 이미 예정된 일을 엎을 수도 없고 진행해야 하는 상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불안해하는 내 딸 추슬러서 병원에 나를 데려다주신 분도 강 선생님이셨다. 참 인연이란 것이 뒤늦게 만나서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나도 강 선생님께 필요한 도움을 몇 번 드리긴 했지만, 내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죄송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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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닥칠 부고는 과연 언제쯤일까? 양친이 살아계시지만 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미 가족이 아니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법적으로는 깰 수 없는 가족일 뿐이다.
안부도 한 번 묻지 않는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따뜻한 쉼터이며 안식처인 가정을 새로 꾸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단출하게 딸과 둘이 그렇게 살지만 허전하다. 우리를 괴롭힐 사람도 귀찮게 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공평한 거다.
내가 나가서 살면서 들고 나갔다가 가져온 짐에 딸이 나가서 살면서 들고 갔다가 가져온 짐까지 집안에 곳곳에 이삿짐투성이다. 치워야 하지만 도대체 저 짐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다. 쉬었다가 저 짐을 처리할 기운이 생기면 어떻게든 치우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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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여읜다는 것이 어떠할지 잘 모르겠다. '아빠'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와 내 딸은 다른 사람과 가족관계를 인식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함부로 하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쓰며 함부로 하는 것이 진정한 천륜인가? 그럴 가치가 없는 관계에 얽매이어서 인생을 탕진할 수 없다. 혈연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관계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함께 지내면서 가식적이지 않아도 되고, 너무 과하게 조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가족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적어도 50년 이상은 더 살아야 할 것 같으니 혈연관계가 아닌 다른 가족을 만들어야겠다. 충전하고 의지하고 발전하여 이번 생을 안전하게 마감할 수 있는 건강하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고 싶다.
마음이 편해지면 내 인생은 또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내 머릿속은 잔잔하다. 이제 호르몬의 앙탈 기간이 간신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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