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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 만에 딸이 다녀갔다.
음력으로는 다음 주에 생일이니 오늘 소고기와 새우를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어제는 멸치 육수 우려서 꽃게와 순두부를 넣고 된장을 끓여서 맛있게 한 그릇 먹고, 오늘 가지전 부쳐서 미역국과 꽃게 된장국도 마저 먹고 갔다.
딸 친구가 생일 선물로 보내준 한우를 구워줬더니 접시에 예쁘게 차려서 사진 찍어서 선물 준 친구에게 보낸다. 그리곤 내가 만든 음식을 익숙한 맛이라고 말하며 흥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딸이 오니까 시장도 보고 음식도 한다. 몸이 자동으로 움직여진다. 의지라고는 말라비틀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폐인 같았는데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은 내게는 굉장한 원동력을 끌어올리는 원천이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조차도.
토요일 저녁에 딸이 좋아하는 회를 주문하고, 트롤브루를 한 캔 땄다. 알콜 2.4%, 레몬맛 나는 독일 맥주다. 그나마 내가 좀 마시기에 부담없고 술 마시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딸에게도 무난한 맥주를 한 캔으로 나눠 마시니 적당하다.
딸이 가고 나서 거의 세 시간이 지나도록 눈만 뜨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왜 나를 위해, 내가 필요한 뭔가를 만들어서 하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지.
다시 침묵과 무기력함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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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너무 많은 아픔이 존재해서 이것을 보고 듣는 것도 고통스럽다. 감정을 아무리 쓰지 않으려 해도 잠시 부대낀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으니까, 덜 부정의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천천히 망가지게 우리가 마음을 쓰지 않으면 계속 물러서기만 해야 한다고.
뭔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외면하지 않고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 그 이상의 방법이 없다. 자신만의 혁명은 가능하지만, 세상을 동시에 뒤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든 때가 되면 자기 변혁의 길로 갈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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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이 지낼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꽤 오래, 이렇게 흔들리고 힘들어하며 살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친구이면서 가족처럼 서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댈 수 있는 이를 만나야 한다. 그 외엔 내게 의미 있는 인연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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