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 멈추어야 할 지점을 발견하면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계산하고 다른 길로 가면 된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서 새길을 걸어야지.
이번 일은 딸과 나 사이에 벌어진 일 중에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딸이 뭔가 말하기 위해 내게 건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피하다가 부딪히면 조율 없이 내 입장을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전화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딸이 금요일에 집에 왔다. 필요한 일 없이는 귀찮아서 오지 않기로 한 집에는 왜 왔느냐고 못되게 물었다. 온 이유가 있으면 말하라고 다그쳤다. 수요일부터 이틀 동안 저녁에 꽤 긴 통화를 했고 충분히 감정을 토로했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이 감정의 간극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방향을 알지 못하는 딸은 모든 것을 단념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더 냉정해지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풀거나, 완전히 엎어버리거나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선택지를 주기 전까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퇴근하고 집에 열쇠로 닫힌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도 평소처럼 '엄마'라고 부르거나 달려와서 안지도 못하고 서먹하게 뒷걸음쳤다. 내가 얼마나 냉혹하게 굴었던지 완전히 얼어붙었다.
감정 변화 없는 낮은 목소리, 나는 정말 딸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그대로 관계를 닫아버릴 각오까지 했다.
저녁에 음식을 여러 가지 함께 먹었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내 감정에 걸려있던 족쇄가 풀렸다. 꽁꽁 얼었던 마음은 이전과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순간에 스르르 풀렸다. 딸이 내 품에 안겨서 설운 눈물 한바탕 큰소리로 쏟아내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함께 누워서 잠들기 전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결 나아졌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우는 나를 발견했다. 당연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번 모녀 대첩에서 딸이 완전히 백기 투항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에 나오는 강아지는 불쌍해서 감정 이입이 되고 공감하게 되는데 사람의 일에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자신의 문제점인 것 같다고 딸이 말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 같다.
스트레스 요인이 될만한 인간관계를 맺거나 이어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고, 그렇게 항상 맞춰주는 나를 상대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 만만하기 짝이 없던 엄마의 항변은 딸에게 처음으로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생각을 확장하고 귀찮음을 내려놓고 해야 할 것을 챙기고 노력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관계의 어려움과 소중한 것은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돌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딸이 떠난 뒤에 미뤘던 일을 했다. 나는 올해엔 생일을 기점으로 구체적으로 뭔가 확실히 바꾸고 다른 삶을 살기로 했다. 억양, 말하는 습관, 내 것이라며 눈에 힘주는 생각도 내려놓기, 방어적인 이면의 실타래 풀어보기.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생각 덩어리 풀어놓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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