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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6월 1일

by 자 작 나 무 2021. 6. 1.

빌려온 책이 많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냉장고 열면 입에 맞는 음식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행복해지는 순간처럼 책상 위에 쌓인 책 중에 입맛대로 골라 읽을 수 있는 책 종류가 많아서 행복하다. 

 

사실 냉장고 안에 맛있는 것이 많다고 행복할 나이는 아니다. 우리 집 냉장고엔 내가 담근 갖가지 피클뿐이다.

 

성장기에 해마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기 일쑤였던 내가 맛있는 것 좀 먹는다고 흉볼 사람도 없다. 보기 싫을 정도로 뚱뚱하지도 않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어떤 말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적어도 몇 가지는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좋겠다. 내가 그 아이의 냉장고를 채워주고 싶다. 내가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서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딸이 어릴 때, 우리 집엔 책장이 하나도 없었다. 가난해서 쌀도 사 먹을 수 없으니 책은 더욱 살 수가 없었다.  책장 하나를 사서 책을 가득 채우는 게 그때는 소원이었다. 내 딸에게 읽게 할 재밌는 동화책을 사서 안겨주고 싶었다. 통장에 십만 원이라도 여윳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런 혹독한 빈곤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가난하다. 마음마저 가난해서 뭘 그리도 꽉꽉 채우고 싶은지 배를 채우고 돌아서면 머릿속이 빈 깡통처럼 덜거덕거린다. 열심히 비우려고 하던 때도 있었는데 너무 오래 멍청하게 지내서 바보가 된 기분이다.

 

쓸데없이 지식의 숫자만 늘리는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아서 그저 그런 쉰 소리 늘어놓은 뻔한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빈 깡통이 되었다. 

 

*

다음 주에 눈앞이 깜깜한 학생 몇 명 방과 후에 교실에 앉혀놓고 지수와 로그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수학도 곧잘 했는데 손 놓은 지 오래되어서 기억이나 날지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 1년 반을 까막눈처럼 앉아서 속태우고 답답할 그 아이들에게 수학 까막눈을 면하게 해주는 작업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내가 수학 선생도 아닌데 수학도 가르쳐 주고, 영어 선생도 아닌데 영어 문법도 가르쳐주는 것은 그 아이들 시험 점수를 올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혼자서는 결코 손댈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운 장애물 한 가지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서다.

 

나에게도 그런 도움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무엇이 나에게는 어렵고 또 어려워서 넘어야 할 것은 넘지 못하고 벽 앞에 서성이며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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