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한 달을 보내면서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열망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 나오는 마법에 걸린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의 발이 절로 움직였던 것처럼 나를 움직이게 했다.
1월 2일에 내 방에서 혼자 점심을 먹다가 통화하던 제주도 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황급히 가방을 대충 꾸려서 길을 나서던 순간부터 시간이 걸어둔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갑자기 여행용 가방의 비밀번호가 먹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짐을 재점검 하면서 빠진 것을 넣는다고 풀었다가 채운 비밀번호가 먹히지 않았다.
급히 예약한 비행기 시간을 놓칠까봐 당황하여서 평소에 입지 않던 조합의 옷차림에 평소에 신지 않던 신발까지 참 어이 없는 조합으로 옷과 신발을 신고 나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는 제주도 바닷바람으로 날려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잠긴 상태로 다시는 열리지 않는 여행 가방을 들고 나섰다.
2.
다음 신호는 공항에서 촉발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카르마에 휩쓸리는 신호. 알면서 발을 딛는 나를 내버려 두는 지점.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가벼운 일에는 휩쓸려도 큰 문제 없지만, 내 인생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에는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가끔 거울을 보고 나를 직시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밀려드는 일에 쫓기고 지쳐있었다. 혼자 먹는 밥, 혼자 잠드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이렇게 나이 들고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처럼 살고 싶지 않은 열망은 누구든 나를 불러세우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게 했다.
몇 번쯤 사진으로 보아서 익숙해진 사람이 나를 불러세웠다. 말을 걸어주면 돌아볼 수밖에 없는 시간에 그는 나를 불렀고, 나는 그만 돌아보았다. 이미 빨간 구두를 신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3.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휴식과 따뜻한 포옹 같은 것이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진심으로 내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한 때였다.
장소를 옮겨 움직이는 것은 내게 아무 문제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내일 당장 세계의 어떤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공간 이동은 어렵지 않다.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가 중요하다. 내 시간을 부리는 데에 자유자재해지고 싶어서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산다.
파란색 체크 코트를 벗기고 친구가 나에게 빨간 코트를 입혔다. 마법에 걸린 빨간 구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빨간 코트는 다른 옷을 빨갛게 물들일 만큼 염료가 불안정하고 진했다. 원피스에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 대신 처음 신어 보는 긴 부츠를 건네줬다. 내가 신고 간 운동화와 파란색 체크 코트는 며칠 뒤에 종이 상자에 담겨서 택배로 내게 돌아왔다.
작용과 반작용의 크기는 비례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타인과 관련한 기쁨은 선택해서 받아야 한다. 내가 일군 기쁨이 아닌 타인과 연루된 기쁨은 거기에 동반한 슬픔과 아픔 또한 그 만큼 클 수 있다. 그걸 받아들일 각오가 되지 않으면 그런 기쁨을 쉽게 받아선 안 되는 거다.
4.
열리지 않던 여행 가방은 서귀포 친구 집에서 친구가 건네준 일자형 드라이버로 간단하게 해체했다. 껍데기만 보고 싸게 샀던 그 가방은 예견된 문제가 생겨서 중요한 물건을 담아다닐 수는 없게 되었다.
예견된 문제를 알면서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경우엔 반드시 뒤따르는 대가가 있다. 나중에 치르면 괜찮은 대가인지 한 번쯤 생각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하면 가벼워진다. 그러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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