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가고 나니 갑자기 앞이 캄캄해진다.
어제저녁 늦게 용달차에 박스 몇 개 싣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오늘내일 이곳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낯선 도시
낯선 공간
낯선 사람
모든 것이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진 기분......
왜?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마음이 불안정하고 서글프다. 1년 동안 여기서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로 했는데...... 어제는 딸이 함께 와서 같이 자고 같이 눈 뜨고, 밥도 같이 먹어서 괜찮았는데......
집 떠나기 전에 딸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선물 받은 쿠폰으로 우리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초콜릿 케이크를 바꿔왔다. 딸이 초코를 싫어하고, 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들고 온 것을 내내 후회했다.
싫어하던 것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사하면서 남은 케이크를 들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냥 가버렸다. 이걸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먹자니 속이 울렁거려서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그래서 선물도 함부로 받는 게 아니다.
*
일은 한 가지씩 해결하면 된다. 이론상 그렇지. 실제로도 해보면 그 방법밖에 없기도 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여기서 쉬어야 할지. 통영으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거나 혼자인 건 똑같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 어제 갑자기 저녁에 이사하게 됐다. 오늘 아침에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그럴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이 생겨서 급하게 낮에 용달차 계약하고 저녁에 딸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용달차 운전하시는 분이 이야기하다 보니 한동네에서 오다가다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봤지만, 이사할 곳으로 가는 내내 어릴 때 살던 동네, 골목, 해질 때까지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하던 놀이까지 끝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좁은 차 안에 갇힌 듯 타고 있는 딸이 혹시라도 불편할까 봐 꽤 재잘거렸다. 물동이, 따발이, 단방구..... 그 동네에서 어린 시절에 잠시 스쳐간 말이 나오니까 어찌나 반갑던지
"단방구라는 놀이를 어떻게 하는지는 까먹었는데 진짜 억쑤로 재밌었지요."
집 근처에 오후에 열리던 시장 골목에서 부침개 부치던 냄새, 싸구려 밀가루 소시지 끼워서 밀가루 옷 빵빵하게 입혀서 튀긴 핫도그를 설탕에 푹 찍어서 케첩 뿌려서 먹던 기억까지 한동네에서 자란 비슷한 세대의 천진난만하던 시절의 기억은 참으로 달달하고 고소했다
얼마 전에 길에서 넘어져서 무릎과 손바닥으로 충격을 흡수하느라 몸 바친 바람에 목, 어깨, 허리까지 교통사고 당한 듯 아프다고 말했더니 짐 옮기는 것은 계약한 요금과 별개여서 늦은 시각에 해 줄 수 없다고 했던 그분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위층까지 옮겨주고 가셨다.
나더러 새파랗게 젊으니 앞으로 돈 벌 기회가 많을 거라고 해서 웃다가 시작한 대화가 그분의 계획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친절로 이끌었다.
이삿짐을 1층에 내려놓을 때도 딸이 다 하느라 힘들어했는데 올려다 놓는 것은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동네 누나였다. 순순히 그 많은 짐을 등에 지고 올려다 주고 가셨다. 그 많은 용달차 전화번호 중에 내가 떡하니 고른 곳이 요금도 가장 저렴하고 한 다리 건너니까 아는 사람인 거다.
며칠 드러누워서 운신도 제대로 못하던 내 대신 그 짐을 다 옮겨야 했던 딸이 고마워서 남은 일을 순순히 해줬다. 이사한 기념으로 밤늦게도 배달되는 중화요릿집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고 닦아도 닦아도 시커먼 때가 나오는 집을 닦고 또 닦은 다음에야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
이삿짐 옮겨놓으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배고파 죽겠다고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이 나오는 딸을 달래려고 뭐든 먹고 싶은 거 말하라고 했더니 탕수육을 시켜달란다. 밤늦은 시각이니 부담스럽지 않은 것으로 먹자고 겨우 달래서 짬뽕과 볶음밥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근처 마트에 얼른 달려가서 걸레로 쓸 것을 사 왔다.
용달차를 부를 생각을 못하고 택배로 이불 짐을 먼저 부치면서 우리보다 택배가 먼저 도착할 줄 알고 새로 산 걸레도 그 상자에 넣어서 보내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뭐하러 택배는 부치고 다음날 바로 용달을 불렀단 말인가. 갑자기 목돈 드는 거 신경 쓰여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쓸데없는 지출을 더 했다.
*
오늘 아침, 새 직장에 가서 서류 정리를 하고 약속한 오후 시간에 월세 계약을 했다. 어제 이사 들었으니 어제 날짜로. 일터는 22일에 출근했어야 했는데 넘어져 다친 핑계에 이사를 못해서 대중교통을 환승해서 아침에 갈 수 없는 곳이어서 그날 못 간 바람에 22일 날짜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여태 이렇게 수월하게 일이 풀린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걱정하던 일이 술술 풀린다. 요일별로 출근할 두 곳의 일터에 걸어 다니는데 얼마나 걸릴지 오늘 두 번이나 가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걸어 다녀야 할 길을 익히고, 가장 가까운 마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형마트까지 걸어서 거리감과 위치를 익혔다.
잘할 수 있다. 잘할 수 있다. 잘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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