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드라마 '모범 가족'을 본다고 했다.
줄거리를 읽는 순간 '오자크'라는 미드가 떠올랐다.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이상한 일에 연루되는 골 때리는 드라마다. 한국판 오자크인가 생각해서 안 보려다가 한 편 보고 생각난 것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다.
줄줄이 딸린 자식이 가지 많은 나무라고 대비해서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그 가지는 부모와 자식 간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이 금세 떼어낼 수 없는 인연도 그에 버금가는 많은 가지에 속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 속세의 피곤한 인연을 빨리 정리하고 단출하게 사는 게 하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부딪힐 때마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삶이 싫다면 그 연결 고리를 다 끊어내는 수밖에 없다. 일어나야 할 일이 다 일어난 뒤에야 스르르 풀리는 그 족쇄를 순연하게 끊어내는 방법은 연결되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과 관련한 카르마를 녹여내는 과정을 마무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내 나이 20대 중후반에 내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 하나하나 다 불러내어 그 대가를 달게 치르겠노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이나 현생에 무심코 지나치며 지은 죄 한 올도 남김없이 대가를 치르겠다고 다짐하며 참회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참 많은 일을 겪어냈다.
이후로는 나를 찾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 무풍지대에 들어왔다. 꽤 오래 이렇게 지내다 보니 편안하기는 한데 이렇게 안일하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글로 뱉어내는 자잘한 일은, 실은 어떤 무게도 없는 가벼운 일이다. 나도 남들처럼 그렇게 사는 척하며 거기에 잠시 감정 이입해서 따라붙는 정도의 흉내는 내본다.
그런데.......
작년 여름 지나고 내 옆자리에 앉았던 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에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다.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급작스레 친하게 된 온라인 친구가 알려준 길로 따라나섰다. 잠시 곁눈질하며 신경 쓸 뭔가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 덜 지루할까 싶어서.
드라마 '모범 가족'의 남자 주인공이 이상한 일에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연루된 것처럼 내 인생을 살짝 뒤집을 만한 이상한 일에 나도 갑자기 연루되었다. 입안에 침이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어야 옳을 상황에 남의 집 불구경하듯 나는 아주 이상한 감정으로 그 일을 바라보고 있다.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란 말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을 생각해보면 나쁜 일이 다 나쁜 일만은 아니고, 좋은 일이 다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아직은 열린 결말에 그 일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큰일에는 의외로 담담하다.
운명 공동체인 딸에게 전말을 다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떻게 일이 엎어져도 그냥 살기로 했다. 그대로 받아들일 각오를 했기에 이미 나쁜 일은 당한 것과 다름없다. 그럼 이제 좋은 방향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이 일을 이용할 차례다. 한 철만 더 쉬고. 한 박자만 더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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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은 쪽으로 잘 엎어지면 기회 닿을 때마다 나중에 능력이 생기면 하겠다고 말하던 일을 하고 싶다. 쉼, 관찰, 연구의 차원에서 둘러보고 싶은 곳에 다녀와서 그 욕심과 관련한 인연을 찾고 만나야겠지.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적극적인 상상을 해본다. 여태 멀리 떠난 여행도 그렇게 이뤄졌고, 금세 고꾸라져서 죽을 것 같았던 삶도 그렇게 다시 세웠다. 과연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완전히 엎어져서 내 앞에 큰 숙제로 떨어져도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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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도 다녀와서 쉴 수 있는 공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안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치열하고 고달팠던 시절을 겪어보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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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몹시 불편하게 하던 작은 부딪힘에 무관심한 듯 지나쳤더니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이번엔 그때 일부터 소환하여 차분하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지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리고 최근에 있었던 일은 실수였던 것처럼 변명했다. 그리고 덤으로 내가 하지 않은 나쁜 짓을 했다고 그 자리에서 크게 말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듣는 사람 처지에서 그 일은 기묘하게 변했다. 그냥 물러서지 않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그려서 말해줬다. 얼마나 못된 생각으로 꽉 찼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그려내서 사실인 듯 말했다.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그 순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떠드는 그 입을 보고도 이번엔 버럭버럭 하지 않고, 이번 일을 계기로 일취월장할 거라는 덕담을 해줬다.
아주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그냥 넘겼더라면 그 짧은 순간에 생긴 오해로 나는 변명이나 사실 확인을 할 기회도 없이 천하에 나쁜 인간이 되는 거였다. 내가 묻고 확인하고 바로잡을 의지를 가지는 것이 그 사소한 일에 대해 집요한 반응이 될까 걱정했다. 하지 않았으면 그 일이 불어나서 얼마나 큰 눈덩이로 변했을까 생각하니 사람을 대하는 일에 아무리 조심해도 의도하지 않은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인 모양이다.
뻔한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이 일을 우회할 대책을 세우고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겠다. 필요 이상으로 애쓰면 오지랖이 되어 중용의 도를 넘을 것이며, 알고도 가벼운 일로 치부하고 또 넘어가면 다른 이상한 결과를 만드는 나비효과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내 앞에 있는 인연에 충실하고 진실될 것.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라도 작은 부딪힘으로 시작하여 큰 파도를 만들고 카르마를 생산하는 큰 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