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5일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 날씨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학생들이 안전귀가하도록 오후에 2시간 단축해서 일과가 끝났다. 내일은 자연재해를 이유로 온라인 수업이 이뤄진다. 일과가 그렇게 잡혀서 오늘부터 내가 사는 원룸에서 사흘 같이 지내자고 하던 동료는 재택근무를 신청하고 본가로 퇴근했다.
청소를 번듯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집에 와서 입고 나갔던 옷을 자유분방하게 벗어서 툭 던져놨다. 이게 뭐라고 이런 정도에서도 해방감을 느낀다. 그만큼 나는 매사에 자신을 옥죄며 살았던 시기가 길었다. 이제 이 편안함 혹은 내 멋대로에 길들여져서 반듯반듯하게 항상 정리하는 삶으로 돌아가긴 어렵겠다. 굳이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누군 쓸고 닦고 정리하는데 자기 시간의 많은 양을 쓴다고 들었다. 나는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치우고 그 시간에 쉬거나 놀거나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한다.
김밥 몇 줄 사러가기엔 꽤 먼 동네까지 가서 김밥 두 줄에 그 집에서 직접 튀겨서 파는 어묵을 포장해서 왔다. 한 줄은 저녁으로 먹고(밤에 다 먹어치울 가능성 다분함) 한 줄은 내일 낮에 라면 끓여서 같이 먹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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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점심을 먹는다. 내가 웃으면서 밥 먹으면 큰 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분위기다. 오전에 일 열심히 하고 누군가 흘린 땀의 결과로 맛있는 음식을 받았으면 기분 좋게 먹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경건하다 못해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다. 그간 그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은 좀 느낌이 달랐다. 남의 표정이 어떻거나 말거나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맛이 별로인 밥도 그냥 맛있게 먹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의 시선도 이젠 피하지 않고 인사를 먼저 하거나 마스크를 써도 활짝 웃으며 인사를 나눌 정도로 이전의 모습을 찾았다.
기분 조절이 아무래도 안 되던 그 상태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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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 열흘을 훌쩍 넘기고 어제 그에게 연락했다. 정작 기다리는 소식은 여전히 감감하고, 그도 아직 알 수 없다고만 말했다. 도무지 지금으로선 어떤 쪽으로든 단정 지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나쁜 쪽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더 강하다.
한동안 기대하면 더 크게 실망할까봐 희망 회로는 끄고 잠잠하게 기다리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문득문득 생각은 바라는 방향으로 조만간에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도 한다. 오늘은 실컷 재밌는 생각이라도 해야겠다.
그러잖아도 빗길을 달리면서 문득 생각지도 않았던 장면이 현실인 듯 그려져서 혼자 웃었다. 비전은 내 의식이 만드는 것인지 이미 흘러가고 있지만 내 앞에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미리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처음 일을 벌이기 전에 고민하면서도 내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면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려본 잡다한 많은 그림이 한 장씩 눈앞에서 나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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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내리고, 날씨도 이상하고, 피곤한 상태로 집안에 갇혔는데도 묘하게 기분 좋다. 이제 정말 그 지독한 우울증 같은 게 사라진 건가? 기분 좋은 생각을 아무리 해도 금세 풀이 죽곤 했는데 이젠 그게 조금 길게 유지되고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곰팡이 핀 것 같았던 감정선이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다.
내일은 청소를 말끔하게 하고, 수요일에 퇴근한 뒤에 동료와 이곳에서 조촐한 와인 파티를 하고, 목요일엔 퇴근하고 연휴를 함께 보낼 딸을 데리러 갈 예정이다. 이렇게 연이어 만날 사람이 있으니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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