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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투덜투덜

by 자 작 나 무 2023. 5. 25.

처방받은 약 끊고 사흘은 좋았다. 이렇게 낫는구나 싶었다. 딸은 내게 이제 아플 만큼 아파서 낫는 것인지, 약 때문에 낫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서 하루 분 남은 약을 끊고 일상에 복귀하고 이틀 만에 통증은 다시 나를 움츠리게 했다.

 

그 신경외과에서 내 목덜미 따라 올라간 자리에 머리카락을 해치고 뒤통수 어딘가에 긴 주사를 꽂았다. 이후에 처방해 준 근이완제, 소염진통제를 먹고는 거의 움직일 수가 없어서 가만히 누워서 지냈다. 그렇게 쉬고 나면 조금 괜찮은 것 같다가도 기운은 돌아오지 않고 입맛도 떨어지고 손이 파르르 떨렸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간 내 몸을 몰아쳐서 쓰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그냥 견디기만 해서 이제는 안 된다고 내 몸이 극렬히 저항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쉬기로 했다. 책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할 정도의 집중력은 생기지 않아서 요즘은 거의 숨만 쉬고 산다. 이런 상태에서 뭘 더 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게 우스운 거다.

 

뭔가 다른 것에 관심을 두면 나아질까 해서 변화를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영 시들한 게 관심이 그 이상 생기지 않는다.

 

*

정말 오랜만에 옛 친구 생각이 났다. 서른세 살에 과로사한 내 절친.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라서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했다. 여고 졸업식에서 유일하게 둘이 같이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편하게 해 주던 그 친구를 잃은 뒤에 그 정도 마음을 열고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게 쉽지 않았다.

 

누구든 길거나 짧게 스치는 동안만 집중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선 모두 스치는 바람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오래 친하게 잘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치는 벽이 만만치 않다.

 

온라인 카페에서 알게 된 오랜 인연들 중에 서울 갈 때마다 만나던 두 분이 내가 몇 달째 온라인에 글 한 줄 쓰지 않으니 차례로 안부를 물어오셨다. 두 분께는 다소 미안하지만, 내 블로그 외에 온라인 게시판에 댓글도 한 줄 쓰기 싫을 만큼 불특정 다수가 집중해서 보는 게시판이 불편하다. 말 만들고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안주거리가 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있었는데 지금 나는 소심하기 짝이 없다.

 

어제 냉감 바디필로우를 하나 사 들고 왔다. 전에 딸에게 사 준 것과 같은 무늬로 사고 싶었는데 같은 것 샀다고 뭐라고 할까 봐 신경 쓰여서 무늬가 다른 것으로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새로 산 것에 정이 가지 않고 덜 시원한 것 같다. 누운 자리에서 이러저러해서 내가 똑같은 무늬를 사지 않았다고 말했더니 그게 뭐라고 신경 쓰느냐고 딸이 나를 나무랐다.

 

그만큼 내가 소심한지 몰랐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소심한 사람인지 반증하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하면 부딪히지 않을 사소한 것을 다 피해 가려고 너무 애쓰는 거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게 세상에 몇 가지나 있을까. 양보할만한 것은 그냥 양보하면 된다.

 

인생의 중요한 것을 나누지 않을 대상의 말에는 신경 쓸 여지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

새로 산 여름 잠옷이 환자복 같다며 딸이 놀렸다. 집에서 그 옷을 입고 거의 반나절은 환자처럼 누워 있으니 환자복 맞다. 아직도 그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혈압이 오른다. 갑질 대마왕. 왕짜증. 왕재수. 꼴 보기 싫다.

 

일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된 내가 이런 핑계나 사고 없이는 쉴 수 없으니까 내가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생긴 일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 더 이상의 감정은 싣지 말아야지.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딱 이만큼 감정 정리가 된다. 돌아가서 12월까지만 잘 견디면 다신 안 봐도 된다라고 생각하고 참고 견디자.

 

*

그 친구가 살아있다면 이럴 때 찾아가서 그냥 같이 밥 먹고 잡담 좀 하다가 내가 겪은 일을 그대로 한 번 쏟아내고 나면 다 풀릴 것 같은데 그대로 쓸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이 현실이 내가 넘어야 할 작은 언덕이다. 

 

 

*

내일이면 딸의 교생실습이 끝난다. 바로 짐 싸서 주말에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나마 4주 동안은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서 참 좋았다. 감사했다. 그렇게 독립하게 둬야 하는데 난 도무지 이렇게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만나서 함께 남은 인생을 기대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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