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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5.28

by 자 작 나 무 2023. 5. 28.

세상이 오늘 이대로 끝날 것처럼 비가 내렸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희부옇게 흐려져서 한 치 앞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쏟아지는 빗길에 있어도 담담하기만 했다. 딸이 옆자리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그다지 억울하거나 슬플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현실 감각 없는 덤덤한 감정으로 빗길을 뚫고 대학 기숙사에 딸을 데려다주고 왔다. 바리바리 싸들고 왔던 짐을 그대로 다시 싣고 가서 만났던 자리에서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비는 더 무서울 만큼 시야를 가렸다. 이런 날 낮이라고 미등도 켜지 않고 달리는 앞차에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한마디 한다.

"어지간하면 꽁무니에 불 좀 켜고 다녀주면 안 될까?"

 

4주 만에 농담할 기운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함께 지낸 딸을 보내고 오는 마음이 착잡한 게 아니라 어쩐지 홀가분했다. 마음의 준비가 제대로 된 모양이다.

 

*

김칫국 마시기

"너 정말 올해 그 동네 임용고시 합격하면 겨울에 방 구하러 같이 다니고, 혹시나 발령 대기 6개월 정도 걸리면...... 우리 6, 7, 8 석 달 유럽 여행 가자. ㅎㅎㅎ 벌어서 갚을 각오하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간 날 때 그냥 가자."

 

"그때 봐서......."

올해 몇 명을 뽑을지도 알 수 없고, 합격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불편한 것인지, 나와 긴 여행을 무작정 떠나는 게 불편한 것인지 딸은 한 발을 뺀다.

 

철없는 나는 아직 현실이 버거운 거다. 도망치고 싶은 거다.

 

집에 돌아와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냉장고에 차게 보관해 둔 생크림 팥빵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만들어둔 가지 덮밥 재료에 가지 한 개를 더 구워서 넣고 밥 위에 올렸다. 어제저녁에 감바스 만들 때 넉넉하게 준비한 양송이버섯과 양파, 당근을 쫑쫑 썰어서 넣고 부친 달걀전까지 야무지게 먹고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서 생크림 빵을 먹었다.

 

이제 세상에 한 개 밖에 남지 않은 생크림 팥빵을 먹는 것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길에 긴장한 딸이 휴게소에서 쉬어가야겠다고 나를 잡아끄는 데도 그냥 달렸다. 오늘 이 순간 뿐이라고, 늘 우린 순간을 사는 것일 뿐이라고 이 정도는 그냥 가도 된다고 그대로 속도를 높였다.

 

묘한 불균형 속에 헐거워졌던 나사를 조이는 기분으로 덤덤하게 딸을 보내고 이제야 제대로 다리 뻗고 누울 자리를 본다. 그동안 딸과 함께 지내면서 좋았지만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정말 혼자 조용히 쉬면서 다음을 준비해야겠다. 함께 지낸 덕분에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빨리 회복되었다.

 

*

온라인으로 꽤 오래 알고 지내던 분이 어제 함안에서 열린 초파일 행사에 참여하고 저녁에 통영으로 넘어온다는 글을 읽었다. 얼마나 많은 글을 서로 쓰고 읽고 댓글을 주고받았는지 헤아려보면 대면하지 않았어도 서로의 취향 정도는 충분히 알 만큼 오랜 온라인 친구다. 내가 먼저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말을 걸어야 할 사람이다.

 

아침 일찍 섬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댓글을 읽고, 내가 마침 딸을 데려다주는 날이어서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게 된 것에 안도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 팔짝거리고 덥석 안고도 남을 사람인데 나는 아무것도 읽지 않은 것처럼 모르는 척 하고 내 일만 했다.

 

며칠 전에 안부를 물어온 서울 친구에게 답 인사도 하루 지난 다음에야 했다. 난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난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섭다. 이미 친숙하고 익숙한 사람 외엔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그 게시판엔 한 글자도 쓸 수 없다. 이 정도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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