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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졸릴 때 잘 수 있는 복

by 자 작 나 무 2023. 6. 9.

*

기한은 정해져 있고, 그 기간 안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 한에 하지 않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 있다. 지금이 그때라는 사실을 오늘에야 실감했다. 12시간 넘게 자리에 누워있기만 해도 아무 문제없는 좋은 날이다.

 

시간이 나면 어떻게든 회복해서 멀지 않은 곳에 걸으러 다니거나 드라이브라도 나갈 궁리만 했었는데 그것이 과한 욕심이었다. 5월 내내 아침 일찍 깨서 출근 시간에 딸을 데려다주러 나갔다 온 것도 어쩌면 무리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냥 쉬는 기간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오래 자리에 누워서 밖에 나갈 궁리하던 스위치를 꺼본다. 몸이 아픈 곳 없이 피곤한 상태다. 잠을 깊이 푹 자야 되는데 생각이 많아서 그러지 못했다. 이제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될만한 것을 다 끊고 조용히 며칠만이라도 푹 자면 괜찮아질지 두고 봐야겠다.

 

 

 

*

초등학생이었을 때 조숙한 친구들은 빨리 2차 성징을 보였다. 가슴이 생기고 겨드랑이에 털이 났다. 나는 어쩐지 그런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피할 수 없는 변화라도 피하고 싶었다. 매끈한 겨드랑이에 시커먼 머리카락 같은 게 자라서 수북해진 친구의 몸을 보고 나니 내 몸엔 그게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골몰하게 됐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누워서 잠들기 전에 내 언행에 잘못된 부분을 생각하고 돌아보며 속으로 고쳐 말하고 사소한 잘못도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마음의 에너지를 모아서 쏟는 시간에 내 몸에 명령하기 시작했다. 제발 내 몸에 그 부위엔 털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내 몸은 내 것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시도를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시작해서 지속 반복하여 꽤 오래 시도했다. 틈틈이 그런 시도를 기도처럼 반복해서 결과는 성공이었다. 나는 여름에 겨드랑이에 제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살았다. 구태여 지금부터라도 그 부위에 털이 나길 바라진 않는다. 다른 부분에는 남과 같이 털이 나야 할 곳엔 다 나서 잘 자란다. 내가 원하지 않는 부분에 나지 말기를 명령한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와 비슷하게 조금씩 엉뚱할 수도 있는 정신적인 체험을 더러 했다. 이런 것은 누구나 가능한데 시도하지 않아서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며칠은 기운이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누워서 생각하고 숨만 쉴 계획이다. 내일 딸 만나서 밥 먹기로 한 시간만 제외하고. 

 

운동하면 빨리 건강해질까 해서 몸을 놀렸더니 더 힘들다. 다시 출근해서 제대로 견딜 수 있게 더 쉬어야 할 모양이다. 근무 중엔 피곤해서 잠시 조는 것도 책상에 엎드려서. 쉬는 시간에 화장실 다녀올 새도 없이 나를 찾는 학생들 상대하느라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면 이렇게 늘어져서 누워있을 수 있는 이곳이 천국이고,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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