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기운이 없어서 한동안 허튼 꿈도 꾸고 말장난도 하며 그나마 버텼다. 이쯤 되면 슬슬 기운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느껴본 적 없는 상태를 경험한다. 30대 초반에 그렇게 기운 없을 때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가도 나중에 훨씬 건강해져서 잘 살았다. 다시 그런 시기인지 가만히 고여서 숨 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랜만에 직장 동료의 안부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니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진심 어린 위로를 해준다. 아이 넷 낳고 기운이 다 빠졌을 때 자기도 그랬다며 아이 하나 낳았다고 생각하고 꼼짝도 하지 말고 쉬라고 일러준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여도 아이 셋 낳고, 가슴으로 낳은 아이까지 아이 넷을 키우는 대단한 사람이 내게 해주는 조언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어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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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떠오른 기억을 이야기로 정리해본다.
딸이 젖먹이였을 때, 집에 쌀이 떨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집안일이며 아이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해서 무척 힘들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젖 먹는 아이를 먹이는 일까지 하느라 잠을 6개월 동안 거의 제대로 잔적이 없어서 그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텨야만 했다.
아이 생후 100일 전후로 먹는 게 시원찮으니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분유를 먹이려고 했지만, 딸이 젖병을 빨지 않으려고 잇몸으로 젖병을 끝내 거부해서 분유를 사다 놓고 먹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입맛 까다로운 딸을 어떻게든 먹여야 하니까 단백질 섭취를 해야 하는데 쌀 살 돈도 없이 고기를 사 먹을 수가 있나.
바닷가에 아이를 업고 나가서 달래다가 초저녁에 집 앞 바닷가에서 줄낚시 하는 커플을 두어 번 보게 됐다. 물때에 맞춰서 옆으로 움직이면서 줄낚시를 하는 거다. 다음날 낮에 천 원짜리 줄낚시와 지렁이 한 통을 샀다. 생전에 지렁이 한 번 낚시 바늘에 끼워본 적 없는데 목장갑을 끼고 손을 덜덜 떨면서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끼고 줄낚시를 휙 던졌다.
눈으로 본 대로 따라서 해보니 거짓말처럼 내가 던진 낚시에 우럭과 노래미가 심심찮게 걸렸다. 낚은 생선 손질을 부탁해서 그걸로 미역국을 며칠 끓여 먹었다. 한동안 해 질 녘에 아이를 등에 업고 집 앞 바닷가에서 그렇게 낚시질을 했다.
우럭과 노래미 낚은 것이 냉동실에 남아돌 만큼 되었을 때 미역국에서 기름 냄새가 나서 역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조선소에서 뭐든 바다에 흘려보낼 것이고 그 주변 바닷물이 보기엔 말짱해 보여도 생선에서 역한 기름 냄새가 날 정도면 그렇게라도 먹고살겠다는 결심도 꺾어야 했다.
노래미나 우럭 등이 굽어진 것을 보고는 낚시해서 국을 끓이거나 구워 먹는 것을 그만뒀다.
조선소 주변 바닷가에 사는 물고기 등이 기형으로 휘는데 방사능 오염수가 바다에 풀리면 소금인들 먹어도 될까 싶다. 이렇게 손 쓸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선 왜 너네 나라에서 싼 똥을 너네가 치우지 않고 우리 집 마당에 버리려고 하느냐고 확 물어뜯을 시늉이라도 해야 옳지 않은가. 이제 미역국도 못 먹겠다. 시장에 가면 생선 미역국은 한 번 더 먹게 생선 사 와야겠다.
바닷가에서 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 지역 사람들은 또 뭘 해 먹고 살아남을까. 걱정이다. 양식장도 줄줄이 타격을 입을 것이고, 시장도 횟집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며, 싱싱한 횟감을 사 먹으러 오는 관광객도 줄어들겠지. 바닷가에선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일 이번 일에 입 다물고 오히려 친일 정책을 지지한다는 문구를 누군가 돈 들여서 동네방네 걸어놨다. 참 희한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