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섬 <2020~2024>/<2023>

밥 냄새

by 자 작 나 무 2023. 6. 12.

어두워질 무렵 부엌에서 나던 밥 냄새는 얼마나 구수했던가. 연탄아궁이에 불구멍을 한 칸으로 줄여서 밥이 뜸 드는 동안 마루에 밥상을 펴고, 식구 수대로 수저를 놓고 밥그릇 국그릇을 차례로 챙겨 놓는 일이 내 담당이었다. 오빠는 아들이어서 열외, 연년생 여동생은 대놓고 나에게 다 미뤘고, 그 아래 막내 남동생이 그 일을 대신할리 없다. 집안에 거들어야 할 살림은 어지간하면 내 담당이었다. 나이가 어리거나 몸이 작거나 그런 것과 무관하게 참 많은 일을 하고 자란 내 손은 손마디가 굵어서 머슴 손 같다.

 

밤늦게 거실에서 끓고 있는 전기밥솥 밥 냄새에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친구네에서 놀다가 배가 등짝까지 붙어서 더 놀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가면 누군가 내 배에 들어갈 따뜻한 밥을 해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축복이다. 일하러 나가신 엄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마당을 쓸고, 수돗물을 시간 맞춰서 수조에 받고, 먼지 앉은 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방에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빗자루질에 걸레질까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걸레를 빠는 손가락이 매번 아파도 내가 하지 않으면 힘든 일 하고 온 엄마가 그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고 밥도 늦게 먹어야 하니까 나는 어떻든 눈치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했다. 덕분에 집안일 갖가지 잘 배워서 못하는 게 없는데 나이 들어 혼자 살면서는 어떻게 이렇게 어질러 놓고도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어질러놓고도 치우지 않는 날도 있다.

 

며칠 힘을 못 써서 어질러진 물건을 그냥 뒀다가 오늘은 우렁각시라도 와야 할 때가 되었다. 거실 구석구석 닦고 또 닦고, 먼지를 박박 문질러서 닦고 걸레를 수도 없이 빨아서 또 닦기를 반복하다 보니 집밖으로 나가야 할 쓰레기봉투에 쓰레기가 가득 찬다. 고장 났어도 가끔 쓸 수 있을 줄 알고 가만히 모셔둔 헤어드라이기도 버리고, 이것저것 쓸모 없어져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쓰지 않으면서도 여태 수고를 다한 물건을 버리지 못한 것들을 간추려서 한 봉지 가득 싸서 버렸다.

 

자랄 때 든 습성이 평생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 편리대로 때로는 한없이 게으르게 살기도 하고, 못 본 척 한동안 시선을 두지 않고 지나다니는 길만 치우기도 한다. 꽤 오래 거실에서 가끔 여럿이 모이면 함께 먹던 밥상 역할을 하던 큰 탁자를 하나 분해했다. 우리 집에 들어온 지 15년은 족히 넘었고, 그 사이에 페인트로 한 번 발라서 쓰다가 더 낡아져서 시트지로 리폼도 했던 낡고 낡은 탁자가 이제야 우리 집 거실을 떠난다. 

 

1층에 혼자 갖다 버릴 힘이 없으니 그 무거운 탁자는 한동안 창고에서 내 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게 될 거다.

'흐르는 섬 <2020~2024> > <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6.15.  (0) 2023.06.15
  (0) 2023.06.13
잊지마~ 타이머  (0) 2023.06.12
현실 직시  (0) 2023.06.12
생선 미역국  (0) 2023.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