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밑이 점점 꺼져 들어가서 흡사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득한 거울 너머에 비치는 내 모습은 현실 같지 않다.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아득한 빗속의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끊임없이 밟던 상태가 꿈결처럼 포개진다.
이게 꿈이라면, 혹은 빗속의 고속도로가 꿈이라면, 어떤 하나가 현실 속에서 졸고 있는 뒤쳐진 인식 상태라면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두려운 거다. 내 인생이 어느 순간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이젠 어떤 현실도 결국 꿈과 같지만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잘 넘기려고 애쓸 뿐이다.
과하게 쓴 현실도 과하게 친절한 현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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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이라고 하기엔 좀 긴 시간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대화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연락을 끊었다. 몇 번 반복하고 보니 이런 경험조차 결국엔 나를 지치게 한다. 어느 바닷가에 흘러가는 섬으로 사는 데에 만족할 수 없는 내 욕망의 갈퀴가 어디든 가닿으려고 간혹 애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만 서로 교차하지 않은 시공간을 억지로 끼워 맞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욕망을 현실화하는 데에는 다소 게으르거나 의지가 부족한 것이겠지만, 이것은 객관적으로 인연 없다는 공식 용어로 정리하는 게 맞다. 인연 없는 이와 인연 맺으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허당 같은 짓인가. 내 노력이 부족한가 하여 노력하려고 했으나, 방향도 잡을 수 없고, 인연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파랑새는 이미 어딘가에 있는데 너무나 투명해서 발견하지 못했거나, GPS에 잡히지 않는 존재여서 이 작은 레이다로는 찾아갈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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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대 중반의 나이가 실감 나지 않은, 어느 대학의 총장이라는 분의 사진을 내밀며 딸이 한참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32년생이면 엄마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 이렇게 젊게 살 수도 있다면, 엄마도 혹은 엄마는......' 이런 기대감을 표현했다. 친구들 부모님 이야기하면 나이 들었다는 말에 서로 걱정을 표현하는데 나를 생각하면 엄마 나이가 이상하게 실감 나지 않아서 걱정할 나이가 아닌 것 같더라는 말도 덧붙인다. 안 늙어 보이니 늙어가는 척하지 말고, 더 젊게 살아보라는 응원으로 들었다. 나는 더 허리 꼿꼿하게 살겠노라고 눈 동그랗게 뜨고 대답해 줬다.
세종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피해서 들른 밥집, 찻집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엔 지난 이야기보다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지난 이야기는 아찔했던 빗길 운전 중에 다 날렸다. 우린 앞으로 상상보다는 더 잘 살아낼 것 같다. 아니, 더 잘 살아낼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야겠다.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눈물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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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일지 이해일지 모르는 생각이 흘러가다가 어느 모퉁이에 걸려서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마음이 쓰려서 심장이 사락사락 아프다. 문득 그리운..... 내 착각 속의 시간. 어지러웠던 그 도시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바로 바다로 뛰어드는 현실 증강 게임 같았던 짧고도 길었던 해변의 산책. 잡지 속의 사진처럼 기억의 아름다운 부분만 오려서 담아둔다. 더 착각 속에 살아선 안 되니까..... 그래도 좋으니까.....
너무 피곤해서 취한 것 같은 이 시간에 내 긴장을 완전히 풀어놓을 수 있는 기억 하나를 건져서 가슴에 품었다가 꺼내본다. 이런 부분은 내가 참 유치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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